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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이 허락되는 공간

문화공간, 책방 - ‘굼벵책방’

by 행복한독서
동네6-굼벵책방1.png ⓒ굼벵책방

“여긴 뭐 하는 곳이에요?”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책방에 들어서며 물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곳을 설명해야 할까? 지난 3년 동안 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는데 이 질문 앞에만 서면 여전히 생각이 많아진다. 나는 이곳에서 무얼 하고 싶은 걸까?

책방의 시작은 엄마였다. 엄마가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냥 돌아와도 될 텐데 이유가 필요했다. 돌아올 이유. 그림책이 그 이유가 돼주었다. 아이를 키우며 좋아하게 된 그림책. 아이보다 더 좋아하게 된 그림책. 그림책은 엄마 잃은 마흔의 아이를 다시 엄마에게 데려다주기도 했다. 소중한 사람이 언제든 곁에서 떠나갈 수 있다는 걸 몸소 겪고 나자 삶의 태도가 바뀌었다.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르게 살고 싶었다. 하고 싶던 일을 하며 보고 싶은 사람들 곁에 있고 싶었다. 숨겨두었던 슬픔을 사람들 앞에 내어놓을 수 있게 해준 것도 그림책이었다. 내가 그림책에서 받았던 위로를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림책방을 지키는 책방지기가 되었었다. 느림이 허락되는 곳 ‘굼벵책방’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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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그림책 찾기

얼마 전 막을 내린 굼벵책방 3주년 기념 전시 「굼벵:뎐」. 자기애 넘치는 엄청난 전시 제목에 걸맞게 이곳에서 나는 나만의 ‘인생 그림책’들을 펼쳐 보였다. 그림책에서 찾아낸 ‘나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걸 좋아한다. 한 권의 그림책은 굼벵의 이야기가 되고, 굼벵의 그림책 이야기는 다시 작가들의 작품으로 태어났다. 왕은실, 오문석 캘리그래피 작가와 진수경 그림책작가가 함께해 주었다. 오로지 굼벵만을 위한 전시였고 좀 이상할지 모를 전시였다.

응원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축하를 받고 싶어 만든 자리였다. 3년만 버티면 된다던 누군가의 말을 부여잡고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3년이 지난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았다. 내가 꿈꾸던 책방이 어디쯤 와 있을까. 계속해도 되는 걸까. 그런 고민들이 끝없이 몰려들던 때였다. 「굼벵:뎐」에 대한 제안을 받던 날,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만두고 싶었던 게 아니라 더 잘하고 싶었던 마음을 이번 전시가 알게 해주었다. 책방의 시간들을 함께해준 나의 작가님들은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있었을까? 정말 이상한 점은 굼벵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전시가 어느새 작가들의 이야기가 되었고 다시 관람객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작품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춤도 추었다. 내 안에 있던 그림책들이 멀리멀리 나아갔다. 굼벵책방을 시작하며 꿈꾸었던 이 책방의 할 일은 단 한 가지였다. ‘인생 그림책’ 찾기. 단번에 만날 수도,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 온 사람들이 언젠가는 인생 그림책을 한 권씩 가지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그 꿈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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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과 만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

따라서 책방의 모든 이유는 그곳으로 향한다. ‘인생. 그림책. 찾기’. 책방을 만들면서 가장 고민했던 공간 구성부터 그렇다. 그림책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는 공간이고 싶었다. 독립된 전시실, 통창 앞의 빈백, 마당의 해먹, 필사와 모사를 할 수 있는 구석구석의 책상들, 이 공간의 역사를 보여주는 작은 박물관 ‘책 읽는 마구간, 책굿간’까지. 단번에도 휘리릭 읽어낼 수 있는 게 그림책이지만 천천히 느리게 그 안에 머물길 바랐다.

책방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 역시 목적은 같다. ‘블라인드 북을 통한 나의 인생 그림책 찾기’는 책방지기가 진행하는 굼벵의 상시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그림책’이라는 그림책 정기 모임도 있다. 매년 한 번씩 밤의 책방을 만날 수 있는 1박 2일 프로그램 ‘그림책, 길을 걷다’는 그날의 키워드 그림책과 함께 자연을 걷고 그림책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다. 마을 공동체 사업으로 진행되었던 ‘그림책이랑 숲이랑’ ‘그림책이랑 영화랑’ ‘그림책 인형 만들기’는 그림책에 대해 잘 몰랐던 지역 주민들에게 그림책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매달 진행되는 ‘미술관이 된 굼벵책방’은 다시마 세이조, 권윤덕, 고정순, 김동수, 오승민 등 국내외 작가의 그림책 원화를 만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되고 있다. 작가와의 만남도 수시로 진행된다. 그림뿐 아니라 테레사 님의 그림책 캐릭터 인형 전시처럼 그림책 관련 전시가 진행되기도 하고, 권윤덕 작가의 『행복한 붕붕어』 전시 때는 그림책 몸짓 공연도 진행했다. 가믄장 제주 설화를 모티프로 한 그림자극 「검은 그릇 아이 이야기」, 테이블 인형극 「닮은 친구」 등 책방은 미술관에 이어 공연장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올해 1월부터 시작된 고정순 작가의 ‘시와 그림책’은 벌써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매달 두 번씩 시와 그림책을 읽는 친구들이 굼벵책방으로 모여든다. 열두 달의 긴 여정이어서 걱정도 많았는데, 시간이 쌓여갈수록 굼벵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애정이 깊어감을 느낀다. 프로그램의 수익금 대부분은 미혼모를 지원하는 단체 등에 기부되었고, 내년에 ‘단편문학과 그림책’으로 이어질 이 프로그램의 수익금 역시 그림책으로 할 수 있는 ‘좋은 일’에 쓰일 예정이다.


그림책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굼벵책방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노인에게 받아든 그 질문 앞에 선다. 이 길고 긴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할까. ‘그림책을 보는 곳이에요. 아이만 아니라 어른도 함께요.’ ‘그림책을 파는 곳이라고 설명했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갸우뚱하던 어르신은 책방 구석구석을 살핀다. 다음엔 엄마랑 오자며 떠나간 두 분은 얼마 후 진짜로 세 분이 되어 책방으로 돌아왔다. 어린이와 함께 온 여느 가족들처럼 그림책을 본다. 엄마가 권하고 싶은 책과 아이가 보고 싶은 책이 달라 서로 고집을 부리다가 아빠의 만류로 결국 두 권 다 계산하는 풍경. 그림책만 사서 서둘러 나가는 이유가 이곳이 불편해서가 아니면 좋겠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든지 언제나 편안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만날 테니까. 당신만의 인생 그림책을.


주소 : 경기 연천군 연천읍 동막로 109

운영 시간 : 13시~18시 (월, 화, 세번째 토요일 휴무)

인스타그램 : @goom_bang


김지연_굼벵책방 대표


-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5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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