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그림책작가의 세계 - 이수연
내가 이수연의 책 중 가장 감명을 받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가』였다. 김개미의 시는 모든 행이 절창이었고, 이수연의 그림은 모든 장면이 압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낡은 배에 실려 바다로 나갔지만 해안에 닿은 배에서는 내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난민선의 비극을 이토록 아프고 아름다운 글과 그림에 담아낸 책과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25년 4월 볼로냐 도서전 부대 행사에서 ‘to stay away from fear’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면서 나는 이 책을 소개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칠레의 작가이자 에이전시인 주최자 비비안이 눈물을 닦다가 강연이 끝난 뒤 나를 끌어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포옹은 김개미와 이수연이 받았어야 했다.
일러스트레이터 이수연 외에 작가 이수연에게 감명을 받은 책은 『달에서 아침을』이었다. 그림책과 그래픽노블의 중간 정도 되는지라 내가 ‘그림책노블’이라 부르기로 작정한 갈래의 책. 자주 다루어지는 학교 왕따 소재였지만 거기에는 도드라진 개성이 있었다. 서사는 탄탄했고, 그림은 부드럽게 섬세했고, 주인공 캐릭터들의 심리는 깊은 개연성을 보였다. 제목에서 어렵지 않게 연상되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에피소드와 모티프들이 적재적소에 잘 짜여 들어가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었다. 실내건축디자인 전공이면서 이렇게 다층적이고 호흡 긴 서사 구성력을 갖추다니, 문학 수업을 꽤 거쳤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내 짐작을 간단히 일축했다.
그림에 회화성이 두드러져 보인다는 내 말에도 그는 ‘미술을 잘 모른다, 딱히 어떤 화가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지도 않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뭔지 차단기가 내려진 느낌이었다. 책도 많이 안 읽고 미술도 잘 모르는데, 그럼 그림책은 왜? 질문을 내 얼굴에서 읽었는지 그는 배시시 웃으며 미리 답을 주었다.
이수연에게는 묘하게, 인터뷰어가 준비해 간 조리 있는 질문을 무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나는 그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전폭적으로 귀만 열기로 했다. 그는 그림책을 만든 순서대로 출판한 게 아니었다. 졸업 후 가구 회사에서 몇 년 영업하고, 가진 것 탈탈 털어 영국으로 가 일러스트 석사과정에 들어가고, 쌍둥이 육아에만 전념하던 때가 있었고, 출판사 문을 두드렸지만 거절만 당한 세월 10년을 지났으니, 어떤 체계적인 단계나 맥락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14년 전에 만들어 두었다가 최근 낸 작품에 “그림이 늘었다”는 평이 달렸더라는 일화는, 그의 작품 세계를 따라잡게 하는 단서인 것 같았다. 이수연이라는 작가의 궤적은 직선이나 상승곡선이 아니라 나선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나선의 시작점은 어디일까.
나는 그것이 ‘어둠’이라고 짐작한다. 첫 책 『이사 가는 날』은 재개발로 살던 곳을 떠나야 하는 아이의 추억과 소망을 다룬다. 표지 그림은 아이가 강아지와 함께 하늘을 나는 환상이지만, 색조는 검은색이 주조이고 형태는 상당 부분 불안하게 흐릿하고 위태롭게 번져있다. 『달에서 아침을』은 ‘어른들은 위선자’라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버린 아이에 대한 기사에서 비롯되었다. 『내 어깨 위의 두 친구』에서는 커다란 검은 표범이 토끼의 어깨 위에 늘 들러붙어 있다. 상실과 불신과 존재의 불안 등에서 비롯되는 어둠이 그에게는 작품의 원동력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그 어둠에 붙잡혀 있거나 끌려가지 않는다. 어둠을 중심에 두되 나선을 그리며 거기서 멀어지고 세상을 밝혀간다. ‘다행히도, 내가 살던 그 집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자각 위에서 옛집의 악취를 떨치고 새로운 향기를 찾아내는 인물(『나를 감싸는 향기』), 아빠가 세상을 떠난 뒤 아빠처럼 기대던 나무가 폭풍에 벼락을 맞아 쪼개져도 ‘폭풍은 지나갔다’며 쓰러진 나무를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물(『비가 내리고 풀은 자란다』), 검은 표범이 어깨에 들러붙어 있는 토끼의 옆을 지키며 위로해 주는 인물(『내 어깨 위 두 친구』), 타인의 삶의 고뇌와 허무와 억압을 위로하고 채워주려 노력하는 인물(『어떤 가구가 필요하세요?』) 들은 작가가 나선을 만들 수 있는 원심력을 제공해 준다. 그리하여 그의 책은 초록과 노랑의 생기를 향하여 부단히 번져나간다. 형용하기 어려운 존재의 어둠과 삶의 불안을 직시하며 빛과 희망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은, 그림책에서는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추상적인 모티프일 것이다. 그러니 그만큼 귀하기도 할 터여서 그의 책은 서서히 세계로 알려지는 중이다. 화이트 레이븐, AFCC 일러스트레이터 갤러리, 한국에서 가장 즐거운 책 등에 선정되었고 프랑스, 튀르키예, 러시아, 대만 등으로 수출되었다.
16장면 안에는 할 말이 다 담기지 않아 그림책 『어떤 가구가 필요하세요?』를 그림책노블 『어쩌다 보니 가구를 팝니다』로 다시 만들 만큼 그의 서사 열정은 각별하다. 그렇게 퍼져 나가는 긴 서사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어쩌다 보니 가구를 팝니다』에 쓰인 문장이 대답이 될 것 같다. 그는 외부와 ‘진실한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이다. 그와 대화를 시작할 때 잠깐 가졌던 차단기의 느낌은, 그것이 활짝 열리며 어떤 절실한 외침이 울리는 느낌으로 바뀌어있다. 나는 그의 이야기가 있어서 좋다. 기꺼이 계속 들어주고 싶다.
“나는 심장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놓아야 했다. 자신에게 진실한 것을 꺼내놓을수록 더 진실한 관계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 어쩌면 내가 인생에서 가장 찾고 싶었던 것들은 그런 것들이 아닐까? 내가 하는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주고, 그 이야기가 있어서 좋다고 말해주는 것.”
김서정_작가, 평론가, 『판타지 동화를 읽습니다』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5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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