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하 글·그림 / 52쪽 / 15,800원 / 창비
두 개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림책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무렵 찾아온 이야기였는데 도시로 음식을 구하러 온 곰을, 이방인에 빗댄 내용이었습니다. 곰은 손수 만든 것(당시에는 아이스크림이었습니다)을 가족들에게 필요한 음식과 맞바꾸고 싶어 합니다. 그런 곰을 도시의 길고양이가 지켜보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다른 하나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저의 동거묘가 되기 전 길에서 살아가던 고양이 ‘치치’를 구한 용기 있는 한 아이와 고양이의 우정을 그린 이야기였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화자가 길고양이였고, 그 시선에 공통적으로 다정함과 연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제 작업 노트에서 곰과 고양이와 아이가 만났고, 고양이가 자신이 경험한 일을 들려주는 하나의 이야기로 묶였습니다.
제게는 자연스러웠지만, 이 이야기를 고양이의 시선에서 끌어가도 괜찮을까 고민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고양이는 곰과 아이의 속마음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을 테니까요. 곰처럼 자신의 서사가 분명한 존재, 혹은 독자가 이입하기 쉬운 아이를 화자로 하면 이야기가 더 편히 읽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곰이나 아이 중 한쪽을 화자로 정해놓고 이야기를 풀면 서사가 너무 그 캐릭터 쪽으로 기울어서 제가 원하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르게 쓰였습니다. 제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한 명의 서사가 아니라 그들 사이의 관계였다는 것을 원고를 다듬는 과정 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여자이자 관찰자인 고양이의 시선을 통해 서로가 어떻게 연결되고 변화하는지 그 흐름을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곰은 쫓기는 고양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저 친구 괜찮으려나?’ 하는 마음으로 뒤따릅니다. 그 순간 둘 사이에 작은 연결이 생깁니다. 고양이도 무거운 짐을 진 곰을 보며 생각합니다. ‘먼 길을 온 것 같은데… 나라도 곁에서 지켜봐 줘야겠다.’ 그렇게 또 하나의 연결이 이어집니다. ‘어! 그때 그 곰탈 쓴 아저씨네? 저래선 안 될 텐데. 도와드릴까?’ 아이의 다정한 관심이 또 다른 연결을 만듭니다. 스치듯 만났지만 서로를 향한 작은 관심이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시작된 관계가 위기를 지나 깊은 우정으로 이어지길 바랐습니다.
『반달 씨의 첫 손님』 속 주인공들이 작은 연결들을 만들며 이야기를 써 내려갔듯, 그림도 그런 방식으로 완성되어 갔습니다. 편집자와 어떤 내용을 그림에 담을지 충분히 상의하고 낮과 밤, 봄에서 겨울로 흐르는 색감도 어느 정도 계획했습니다. 그 외의 많은 부분은 그림을 그려가며 장면 안에서 자연스럽게 결정되었습니다. 스케치를 모두 끝낸 뒤 일괄적으로 채색하는 방식은 지양했습니다. 대신 장면마다 가장 중요한 요소를 먼저 그리고 그 주변을 채워갔습니다. 캐릭터들이 실제로 살아갈 법한 장소처럼 느껴지도록 마지막까지 고민하며 그렸습니다. 예를 들어 곰(반달 씨)이 머무는 곳에는 반달가슴곰이 먹을 수 있는 꿀이나 열매가 나오는 꽃과 나무를 그려 넣었습니다. 계절을 지나며 마주치는 개구리, 지렁이, 매미 같은 작은 생명들과 식물들의 변화를 더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관찰력이 뛰어난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림책 작업에 집중할 때면 몸의 감각을 부지런히 깨웁니다. 눈이 네 개쯤 있는 것처럼 관찰 레이더를 켭니다. 매일 지나던 길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라일락 나뭇잎은 하트 모양이네.’ ‘이 시간에 환경미화원 분들이 일하시는구나.’ 남들은 이미 다 아는 것일 수 있는데, 새롭게 발견하고 알게 되는 것들에 혼자 신이 납니다. ‘그림책 작업하길 잘했어’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먹고사는 일에 치여 놓쳐버렸을지도 모를 순간들을 그림책 작업을 핑계로 천천히 오롯이 충만하게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요. 제가 느낀 바람과 빛, 향기와 촉감까지, 읽는 이에게 잘 전달하고 싶어서 더 열심히 보고 느끼고 그림에 담아보려 애씁니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작은 관심으로 시작된 연결들이 하나둘 쌓이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익숙해집니다. 마음이 놓이면 누구나 감추고 싶었던 무언가가 불쑥 드러나기도 하지요. 그런 위기가 이들에게도 찾아옵니다. 현실에서는 많은 관계가 그쯤에서 멈추거나 끝나기도 합니다. 『반달 씨의 첫 손님』 속 주인공들은 조금 다른 움직임을 보입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비언어적인 소통 방식을 찾아내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관계를 깊게 만들어갑니다. 나아가 친구가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 (잠시) 이별을 불러오더라도 그 선택을 응원하고 기꺼이 기다립니다. 이들의 우정은 가을 단풍처럼 짙고 고운 색으로 물들어갑니다.
안승하_그림책작가, 『반달 씨의 첫 손님』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5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