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지음 / 276쪽 / 16,800원 / 문학동네
『오직 그녀의 것』은 편집자와 그의 일 이야기다.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던 20대 시절에 교열자로 편집 일에 입문한 석주가 편집자로 전향해 “작가와 대등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감각”을 익히고 “백지와 같은 자신의 삶에 높이와 깊이를 만들고 명암을 부여한”다. 그가 쌓아온 시간들은 비록 극적이지는 않지만, 자기 삶에 성실히 임한 사람만이 보여주는 깊이가 있다. 늘 남의 것을 만지며 한 권의 서사를 구성해 오던 이가 기나긴 자기혐오의 터널을 벗어나 비로소 ‘오직 자신의 것’을 엮어내는 모습에 조용한 응원을 보내게 된다.
석주에게서 나의 초보 편집자 시절을 떠올렸다. 10년 차이던 내 사수는 석주의 첫 사수인 오기사와 닮았다. 눈에 띄는 다정을 주지는 않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후배의 길을 터주던 사람. 편집 일은커녕 사회생활 자체가 처음이던 나에게는 그분의 말씀 하나하나가 성경과 같았다. 다만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다고 그의 뜻대로 살지 못하듯이, 사수의 말을 일일이 받아 적어도 그 안의 의미를 온전히 소화하진 못했다. 당연하다. 그때의 나는 교정도 연필로 봤으니까. 교정지가 닳아 구멍 날 때까지 지우개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할 정도로 내가 나를 믿지 못했으니까.
교활한 사람들은 자기혐오에 빠진 초짜를 금방 알아본다. 첫 직장 대표는 소심한 나를 못마땅해했고, 내가 ‘그만두겠다’고 말할 때까지 괴롭혔다. 매일같이 ‘못한다’ ‘재능 없다’는 소리를 들으니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스스로를 그 대표와 같은 눈으로 바라봤을지도 모르겠다.
대표가 원하는 ‘패기 넘치는 신입’이 될 자신이 없어 그 회사를 포기하기로 했다. 사수에게 퇴사 의사를 밝히는 자리에서 그는 이런 말을 건네주었다.
그 말을 나침반 삼아 계속 이 자리에 있었다. 지금껏 그분이 내게 해준 말은 다 맞았으니까, 이번에도 맞다고 믿고 싶었다. 그분의 연차가 되어야 그의 말이 보인다. 그 대표가 원하던 재능과 자신감, 패기는 계속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결과물이다. 이마에 ‘편집자’ 적어놓고 태어난 것처럼 이 일에 찰떡인 이들도 물론 존재하겠지만, 보통은 그냥 매일매일 쌓아 올리는 시간이 “각오가 되고 다짐이 되고 위안이 되어” 내 삶에 새겨지다가 그럭저럭 쓸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장 큰 재능은 시간이었다.
책 후반부로 갈수록 석주는 미덥지 않던 자신을 끌어안을 줄 알게 되었다. 비록 젊음이 사라진 자리에 나이를 채웠지만 그만큼 영글었다고 믿고 싶다. 석주만큼은 아니지만 나 또한 스무 해 가까이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 어느새 앞자리가 4로 변해버린 내 나이에 흠칫하고,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불안해질 때면 그저 모니터를 응시하다가 뻑뻑해진 눈에 가만히 인공눈물을 떨군다. 가끔은 마냥 읽는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일을 계속하는 건 “쓰지 않은 것과 쓸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석주처럼 신입 후배를 앞에 놓고 말을 걸 기회가 주어진다면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지은_출판편집자, 『편집자의 마음』 저자
-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5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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