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개척 시대 동부에서 시작된 도시개발과 산업의 부흥은 서부로 연결되며 물류를 나르기 위해선 마차와 말이 필요하였고, 이들을 노리는 도적들에 맞서기 위해선 카우보이에게 높은 임금을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1886년 조지 웨스팅하우스의 공기 브레이크 시스템의 발명으로 안전과 효율을 바탕으로 한 철도사업은 증기 기관차의 빠른 대중화를 불러오며 마차 업계의 축소와 멸종을 앞당겼습니다. 1968년 이탈리아에서 제작되어 미국에서 큰 흥행을 거두며 ‘스파게티 웨스턴’이란 고유 장르를 만들어내었던 「옛날 옛적 서부에서」는 영화 애호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세르조 레오네 감독과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으로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직업을 잃어가는 이들과 새로운 산업구조에 발맞추어 미래를 준비하는 세력의 이권 갈등 속 인간 삶의 본질을 다루었던 명작이지요. 마지막 카우보이가 동네를 떠나자 홀로 마을에 남겨진 여주인공은 기차역과 레일 설치를 위해 일하는 일꾼들에게 건네줄 물을 떠 나르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질의 테마’가 흘러나오면서 영화는 끝이 나며,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일자리가 기차역 주변에서 탄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한 그림책은 앞서 언급한 서부 시대와 마찬가지로 생산자들의 과도기를 의미합니다. 본격적인 2~3차 산업 시대를 맞이하며 대량으로 제작할 수 있는 다양한 상품들은 문화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소수 상류층에게만 허락된 문화소비 행위는 합리적인 가격을 지불하고 누구나 원한다면 즐길 수 있는 ‘복제 예술 콘텐츠’의 등장으로 대중화되었고 그림책 또한 이에 속합니다. 2000년 초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며 많은 경제학자는 종이 콘텐츠의 멸종을 예고했습니다. 하지만 그림책 소비 형태 변화에 대한 우려와 달리 지류의 촉감과 다양한 판형이 제공하는 시각적 만족감으로 인해 종이책은 여전히 높은 효용적 가치를 지닌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주변을 둘러보아도 일부 정보서를 제외한 다수의 책은 종이 제작 형식으로 출판되고 있습니다.
그림책은 제작자의 입장에서 크게 두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의 역할을 하는 것과 교육서의 기능을 연령별로 충실히 이행하는 형태입니다.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학습 단계별로 기획된 그림책은 글의 내용을 오류 없이 전달되는 과정을 돕는 역할에 그림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글과 함께 공존하지 않는다면 존재가 무의미한 일러스트레이션을 삽화라고 부릅니다. 반면, 그림과 글의 기능이 동등한 존재감을 보이며 현대 창작 그림책에 사용된 그림을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독자는 인식합니다. 우선은 단순히 문장을 묘사하는 수준의 삽화와 학습서 디자인에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대입되겠지만, AI는 끊임없는 학습을 통한 업무 수행 능력을 개발하며 출판 관계자와 예술가의 이용 빈도가 높아지고 창작 그림책 영역에도 공생의 생태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문화 콘텐츠는 기획과 제작 파트란 두 줄기의 제작 루트를 통해 완성됩니다. 그림책 출판사에서도 책임 편집자가 있다면 동등한 권한을 지닌 아트디렉터가 존재합니다. 편집자의 촘촘한 기획과 텍스트가 정리되어 갈 때 이에 부합하는 그림의 장르적 성격과 디테일을 조율하며 아트디렉터는 균형을 유지하고 작품 완성이란 하나의 목표를 위해 정진합니다.
대표적인 이미지형 그림책을 주로 발표해 온 크베타 파초프스카의 『알파벳』(보림, 2015) 같은 작품은 편집자와 함께 그림책 전문 아트디렉터의 조율을 통한 그림의 문자적 기능에 대한 연출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작품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진행되는 아트디렉션이 없다면 그림책이란 콘텐츠의 정확한 기획 방향과 주제 의식이 증발하기 쉽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점이 단편적으로 그림을 모아 편집된 화집과 그림책의 다른 점입니다.
AI는 출판을 위한 모든 과정에 손과 발이 될 것이며, 조율을 위한 방향이 필요합니다. 창작자의 첫걸음부터 완성까지 작가를 통해 AI는 이용되어 예술가들에게 좀더 다양하고 많은 양의 작품을 발표하는 기회를 선사할 것이지만, 또 다른 반면으로는 교육서의 연장선에 놓인 그림책작가들에게는 출판사 직원이 직접 AI를 이용한 제작 방식을 도입하며 일자리 기회를 증발시키는 피해도 발생시킬 것입니다. 대부분의 국내 그림책 출판사는 편집자와 동등한 권한을 지닌 아트디렉터의 역할을 디자인실 책임자 혹은 편집실의 안목으로 대체하는 형태이지만, 시각예술의 발상부터 완성까지 상세한 창작 과정을 이해하고 AI 기술을 이용하는 직원의 부재는 해외 출판사 제작 환경과 경쟁을 하기 위한 발전 과제가 될 것입니다.
그림책을 위한 글, 그림을 창작하는 예술가들은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삽화 업무와 타 장르에 필요한 작품까지 AI에게 연출을 선사하며 넓어진 스펙트럼의 작가 활동으로 발돋움할 것이지만, 기존 삽화가의 일자리는 좁아질 예정입니다. 많은 오퍼레이터(Operator)의 일자리를 대체할 AI를, 예술가들을 통한 다채로운 활용으로 현재보다 더욱 풍성한 작품의 만남을 독자에게 선사할 수 있는 미래가 될 수 있도록 문화예술 분야의 관심과 정책이 준비돼야겠습니다.
류영선_그림책 평론가, 『그림책 보는 기쁨』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6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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