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로 엮은 우리 문화 이야기

by 행복한독서

동장군아, 물렀거라!

진시하 글·그림 / 48쪽 / 17,000원 / 키위북스


어릴 적 나는 사직공원과 경복궁 마당을 놀이터처럼 오가며 자랐다. 할아버지가 경복궁 옆 효자동에서 방앗간을 하신 덕분이다. 어른이 된 뒤로 자주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경복궁은 여전히 내게 문화유산이기 이전에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익숙한 공간이다.


몇 년 전 어느 겨울밤 경복궁에서 야간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그동안 수없이 보았던 근정전 월대의 석조상들이 유난히 다르게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얼굴들이 마치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고, 낮에는 배경처럼 지나쳤던 존재들이 하나하나 이야기를 품은 주인공으로 느껴졌다. 문득 그 이야기들을 귀담아듣고 싶어졌다. 그들을 내 그림책의 주인공으로 뛰어놀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첫 그림책의 배경을 내 어릴 적 놀이터였던 경복궁으로 삼고, 경복궁을 지키는 석수들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동안 이야기 씨앗으로 품고 있었던 ‘온기’라는 따뜻한 낱말을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인 온돌과 아궁이, 그리고 불씨로 연결하며 이야기를 엮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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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약 2년 동안, 사계절 내내 경복궁을 찾았다. 눈 오는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같은 길을 여러 번 걸으며 사진을 찍고 메모를 남기며 그 자리에서 드로잉을 했다. 그림책 속의 나무 한 그루도 그냥 그리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경복궁 안에 존재하는 것들로 하얀 종이를 채우고 싶었다. 건축물은 공간과 구조를 바탕으로 고증하듯 그려 넣었다. 지식 그림책은 아니지만 이야기가 현실과 멀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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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과 아궁이를 소재로 한 책은 이미 여러 권 있지만, 나는 조금 더 모험적이고 나만의 결을 가진 이야기로 풀어내고 싶었다. 이 책을 흑색 펜으로만 그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색을 더하지 않은, 오직 검은 펜과 하얀 종이의 대비 속에서 독자가 충분히 장면에 머물며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길 바랐다. 그림은 머리카락만큼 가느다란 0.03밀리미터 잉크펜으로 정교하고 집요하게 수만 번 이상의 점과 선들을 교차하며 묘사했다. 잉크의 남은 양에 따라 펜을 나누어 모아 두었다가 사용하여 풍부하고 따뜻한 명암의 결을 만들고자 했다. 온기가 이동하는 흐름, 주인공들의 작은 표정 변화, 땅속 온돌이 품은 고요한 따뜻함을 표현하기 위해 겹쳐서 보이지 않게 될 얇은 선 하나하나에도 많은 시간을 들였다.


가장 애정을 품고 그린 장면은 열여섯 마리의 주인공들이 모두 모여 경회루 앞을 지나 아궁이로 향하는 장면이다. 경회루 앞에서 1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겨울을 맞아 아이처럼 뛰노는 모습들을 실루엣으로 검게 표현한 것은 독자들이 경회루의 건축적인 아름다움과 밤의 연못에 비친 풍경에 집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경회루 앞에 앉아 물속을 한없이 바라보며 드로잉을 반복했던 시간들이 그 장면을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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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 고민한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처음에는 임무를 마친 석조상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가 있고, 밤새 만들어진 온기가 경복궁을 찾은 사람들에게도 스며드는 결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선택한 결말은 아침 햇살이 근정전 앞마당을 가득 채운 장면이다. 근정전을 등지고 광화문을 바라보는 시선은 왕의 자리이자 독자의 자리다. 독자를 왕처럼 존중하고 싶은 마음을 그 시선에 담고 싶었다.


첫 그림책이기에 그림도 글도 서툴렀고, 작업 내내 두려움이 함께했다. 그럼에도 두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건 한결같은 믿음을 보여준 고마운 분들 덕분이다. 스승님, 편집자님, 디자이너님, 그분들이 초보 작가에게 건네준 온기 덕분에 끝까지 집중할 수 있었고, 독자들에게 절절 끓는 아랫목 같은 온기를 조심스럽게 내어드릴 수 있었다. 작업을 하는 동안 누군가의 온기가 한 존재를 얼마나 든든하게 지키는지 참으로 크게 배웠다. 성장을 멈춘 것 같던 내가 그림책을 쓰고 그리면서 다시 성장할 수 있음을 배웠다. 가득 채워진 온기로 나 또한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온기를 품고,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동장군아, 물렀거라!』를 읽는 이들도 나와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진시하_그림책작가, 『동장군아, 물렀거라!』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6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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