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대위 오뚜기
큰 아이를 품에 안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였다.
남편이 아이가 100일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다.
100일 된 핏덩이를 데리고 연고 없는 지방 시골마을로 따라갔다.
매일 새벽에 출근하여 밤늦게 퇴근하는 남편의 부대 생활 덕분에 혼자 독. 박. 육. 아를 해야만 했지만,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에 하루하루 견뎌 낼 수 있었다.
6개월 만에 남편은 다른 곳으로 다시 배치를 받았고, 내 부대와 위치적으로 비슷한 곳이 아닌 강원도 양구에 배치를 받게 되었다.
아이가 9개월이 됐을 무렵이었다.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사항이 있었다.
육아휴직을 연장하고 남편을 따라 양구에 가는 방법 VS 혼자 아이를 양육하면서 복직하는 방법
당시 나는 대위 진급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아이를 양육하며 지내는 방법을 선택했다
어차피 1년이야.
1년 뒤면 같이 살 수 있어.
난 1년 동안 싱글 워킹맘이다! 생각하기로 했다.
군인의 특성상 휴가를 내지 않으면 위수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은 한 달에 한번 또는 두 번 주말을 이용해 집에 올 수 있었다.
아침에 아이를 깨우는 것부터가 큰 일이었다.
나는 8시 정도까지는 출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이는 어린이집이 문을 여는 7시 30분 제일 첫 번째로 등원을 했다.
자는 아이를 그대로 카시트에 밀어 넣어 가거나, 잠이 덜 깨 울고불고하는 아이를 선생님께 던지듯 인계하고 오기 일 수였다.
이제 겨우 9개월의 아이였다.
퇴근을 하고 어린이집에 가면 우리 아이는 언제나 꼴찌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집에 와서는 대충 저녁을 먹고 아이를 씻기고 재우기 바빴다.
아이와 내가 하루에 눈을 뜨고 온전히 마주하는 시간은 한 시간에서 두 시간 남짓.
그마저도 나는 부대에서 힘들었다는 핑계로 아이와 충분한 교감을 해주지 못하곤 했다.
어느 날 문뜩. 이런 내가, 이런 나의 환경이 진절머리 나게 싫었고 미웠다.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나 나는 부족한 엄마였고, 부족한 아내였으며 부족한 군인이었다.
자부심 있고, 나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던 자존감 높은 나는 어디 갔는지 없어진 지 오래였고, 초라하고 숨고 싶은 나 자신만이 남아있었다.
"나"가 없어진 지 오래였고, "엄마"라는 이름 아래 엄청난 책임감과 중압감만이 가득한 시간들이었다.
내가 나를 평가해 보았을 때, 나는 빵점짜리 엄마였다.
모두가 혼자 아이를 키워내며, 직장생활까지 하는 게 대단하다 라고 했지만..
나는 내가 대단하지 못했다. 아주 형편없었다.
아이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아이가 울어도, 아이가 아파도.. 나는 아이에게 가지 못했다.
그냥 난 아이에게 '죄인'이었다.
그런 마음만이 가득한 나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