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들이 반드시 받아야 하는 6개월짜리 교육과정이 있는데 다음 기수로 내가 편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응? 나 육아휴직 중인데...??'
가기 힘들면 다른 사람과 기수를 바꿔 더 늦춰서 그다음 해에 갈 수도 있다고 했다.
고민을 했다. 하지만 길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가자.
어차피 길게 생각한다고 딱히 뾰족한 수가 나올 거 같지 않았다.
그 교육과정은 약 35명의 조종사 대위들이 만나 약 6개월 동안 선의의 경쟁을 하며 좀 더 나은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으로써, 다음 차기 진급심사 시 성적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요한 교육과정이었다.
나 개인으로만 봤을 땐 불리한 상황이었다.
나는 세 번의 임신과 두 번의 출산 그리고 한 번의 유산을 통해 비행경력, 훈련 경력, 참모 경력이 그곳에 들어가 교육을 받기엔 현저히 떨어졌다.
누가 봐도 복직 후 1~2년이라도 더 실무경험을 쌓고 교육기관에 들어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나에게 이번에 기회가 온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작은아이가 이제 갓 8개월이 넘었을 때의 일이었다.
나의 결정에 남편은 육아휴직을 택해주었다.
남편은 언제나 나의 결정을 묵묵히 응원해 주고 따라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어제는 집에서 애들 보고 이유식을 만들고 정신없이 집안일을 하다가 오늘은 갑자기 학생이 되었다.
교육을 받는 곳은 논산이어서 가족들과도 생이별을 해야 했다.
처음에 가장 힘들었던 건
정신없이 몸을 움직여야 했던 주부에서..
가만히 앉아 수업을 들어야 하는 교육생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어색한 단어들과 교육내용들, 수많은 시험, 그리고 아이들 걱정...
너무나 많은 생각들과 감정들이 머릿속에 복합적으로 섞여 몸적으로 마음적으로 힘이 들었다.
아이들을 낳고 뇌까지 낳아버렸는지, 방금 한말도, 방금 한 행동도 잊어버리기 일수였는데..
그런 내가 계속 야전부대에서 경험하고 능력을 쌓아온 남군 동기들과 겨루어 시험을 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단어 조차 외워지지 않았고, 머리를 스쳤다가 머물지도 않고 흘러 내려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아줌마 파워를 보여주마!
라고 호기롭게 들어왔던 내가 점점 한계를 느끼며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냥 무사히 수료나 하자 VS 나에게 부끄럽지는 말자
첫 번째 꺼를 선택했을 때도 분명 얻는 건 있었다. 스트레스도 덜 받을 수 있고 사람들하고 더 많은 친목을 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때뿐이겠지.. 생각이 들었다.
나중의 내가 지금의 교육기간을 떠올리며 그때 더 열심히 할걸..이라고 후회하진 말게 하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다. 이제부터는 성적은 상관없다. 내가 제대로 알고 가는 게 중요하다.
야전부대로 갔을 때,
'애 낳고 왔다더니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네.'
이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소위 말해 공부 잘하는 친구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같은 학생이었지만 너무 오랜 기간 휴직을 했던 탓에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엔 기본 지식이 너무 없었다..
아이들과 같은 눈높이를 가지고 토의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주말에는 외박이 허락되었는데. 그마저도 코로나 19로 인해 외박이 통제됐다.
청천벽력 같았다.
나에게는 돌봐야 할 아이가 둘이나 있었고 그중 한 명은 아직 돌도 채 되지 않은 아이였다.
1주.. 2주... 3주.. 통제는 계속 됐고, 공부고 뭐고 더 이상은 아이들이 걱정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큰 아이는 4살이었지만 엄마의 부재를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었다. 결국 아이에게 분리불안이 왔다.
학교 측에 외박을 나가고 싶다고 이야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엄마인 내가 아이들이 그 지경이 됐는데도 어쩔 수없다며 공부만 하고 있다면...
글쎄 내 상식으로는 그럴 수 없었고 그래서도 안되는 거였다.
그 주 주말도 어김없이 외박이 통제가 됐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고, 참아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군인에게 명령은 생명과 같은 것이고 상명하복은 군인이 명심해야 할 것 중 하나이다. 그것을 어겼을 때는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은
"난 엄마였기 때문"이었다.
한 달 넘게 만에 갑자기 나타난 엄마에게 반가움, 어색함, 낯섦... 수많은 감정을 느끼는 아이들에게 사랑한다 말해주고 끊임없이 안아주는 것 말고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내가 다녀간 후 훨씬 많은 안정감을 찾았다는 남편의 말에 "그래 다녀가길 잘했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필 그 주에 불시 점검을 했고 나와 몇몇 학생장교들의 무단 외박은 들통이 나고 말았다.
코로나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다음 날 출근을 하지 못했고, 같은 반 학생장교들에게 수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명령 불복종에 상응하는 대가(훈육 점수 감점)도 톡톡히 치러야 했다.
왜 갔어? 주변 학생장교들이 물어왔다.
물음에 일일이 답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의 80프로는 나의 일에 관심 없고 나머지 20프로는 나의 불행을 좋아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엄마라는 단어가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아이의 정신과 영혼이 썩어가고 있는 것을 단지 '엄마는 군인이니까.'라는 이유로
덮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치열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나의 6개월 간의 교육기관 생활은 끝이 났다
6개월 과정을 마치고 수료식을 하고 집에 막 도착을 했는데 담임 교관님께 문자가 와 있었다.
"집에 도착하면 연락 한번 줘라"
전화를 드렸더니
내가 너무 안타깝다고 하셨다.. 좀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학생이었는데 아이도 신경 써야 하고, 공부도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안타까웠다고 수고 많았다고 먼저 격려해주셨다.
"교관님. 저는 성적은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제 스스로에게 당당해지고 저도 할 수 있다는 걸 다시 증명해 보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이제 전 교육기관에서 배운 걸 잘 기억하고 공부하고 나왔습니다. 그거면 됐어요. 전 만족합니다. 그리고 기쁩니다"
좀 놀라신 거 같았다. 내가 6개월 동안 밤에도 교실에 남아 공부하고, 질문하며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쟨 분명 상위권에 들어서 성적을 잘 받고 싶어 하는 애구나"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네가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몰랐다며 열심히 해줘서 고맙다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