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따로 육수 내지 않은 맑은 물을 사용하셨다. 고추장 푼 물에 된장 한 스푼 넣고 무와 콩나물을 넣어 끓이다가 손질한 동태와 고니, 다진 생강 조금을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선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고 다진 마늘과 대파를 넣었고 가끔 엄마 기분이 좋을 때면 쑥갓도 듬뿍 넣어 마무리했다. 가끔 아버지의 해장국으로 상에 올리실 때는 청양고추 한두 개를 썰어 넣었다. 너무 맵다고 타박하시는 아버지에게 엄마는 눈 한번 세게 째려보는 것으로 답을 하시곤 했다. "잔소리 말고 해준 대로 먹으셔. 뭣이 이쁘다고 해장국까지 끓여 바치는지 모르겠네. 아이고 내 팔자야"라는 한 마디와 함께. 청양고추는 어쩌면 술에 취해 들어온 아버지에게 소박한 엄마의 복수의 도구였는지도 모르겠다. 연탄불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빨간 국물 위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습은 마치 여름날 분수대 근처에 서리서리 수증기가 피어오를 때의 모습처럼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게 했었다. 얼큰하게 끓여진 엄마의 동태탕은 칼칼하면서도 시원한 맛 역시 일품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 나들이를 할 때면 아버지와 함께 집 근처 포장마차에 가고는 했다. 추운 겨울날이었는지 그곳엔 동태찌개 냄새가 진동했고, 우리 부녀는 소주 한잔씩을 기울이며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다. 시시콜콜 서로 대화는 없었지만 아버지와 나는 오래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아버지는 거친 손으로 익숙하게 내 잔에 술을 따르시고는 당신께서도 똑같이 잔에 따라 드셨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코끝을 찔렀다. 한참 동안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 없이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셨다. 돌이켜보니 아버지는 딸에게 잠시나마 고단했던 시간들을 쉬어가라는 마음이셨던 것 같다. 부모이기에 자식이 고주왈 메주왈 말하지 않아도 표정만 봐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되셨을 것이다. 마치 어린 딸걱정이라도 하는 듯 바라보는 눈빛에선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졌다. 지금에서야 알게 됐다. 당시 아버지께서 드시던 건 차가운 소주가 아니라 자식 키우며 맘 고생하는 큰 딸에 대한 속상함이 담긴 뜨거운 눈물이었다는 사실을. 힘든 순간들이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때의 아버지와의 포장마차 데이트는 오히려 아련한 추억이 됐다. 다시 한번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니 코끝이 시큰해진다.
늦겨울 찬바람이 꽤 쌀쌀하다.
"밥은 잘 먹고 다니냐? 우리 큰딸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했네" 친정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오래전, 아버지와 함께 갔었던 포장마차에 동태탕이 떠올랐다. 근처 마트에 들러 동태 한 마리를 샀다. 무도 한토막 사고 콩나물도 한 봉지 사서 돌아오면서 그때 아버지도 나처럼 얼큰한 국물 요리와 소주 한잔으로 지친 하루를 위로받으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저녁 무와 콩나물 듬뿍 넣고 청양고추까지 더해서 끓인 얼큰한 국물 한입이면 소주 한잔이 절로 생각날 것 같다. 찬바람 부는 겨울밤 뜨끈한 국물에 소주 한잔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사랑한다는 표현 한마디 없이 무뚝뚝했던 아버지에게 이제는 내가 먼저 말씀드린다." 아빠 사랑해요~아프지 마시고 잘 챙겨 드세요"라고. 그럴 때면 아버지는 농사일에 거칠어진 투박한 손으로 소리 없이 가만히 나의 손을 잡아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