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가족의 죽음에서 마주하게 되는 모든 문제들은 무엇이 있을까?”
가족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힘겨운 ‘통보’를 듣게 되는 경우에 우리는 하늘이 무너진다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7년 전, 엄마는 우리 곁을 그렇게 떠날 수도 있었음을 알게 해 준 시간이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을 때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충격을 받을까 두렵다고 회피하기보다는 우선, 엄마 스스로 막연히 엄마의 생명을 연장하는 데 집착하기보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자신을 정리할 시간을 줘야 하지 않을까 라는 고민도 했었다. 엄마 삶에 마지막의 모습을 결정할 수 있도록 말해주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놓고 동생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에 의논을 더했지만 쉽사리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치가 100단인 엄마는 우리의 고민을 눈치채셨는지 정읍에 계신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하셨다. 자신이 예상한 병명을 말하기가 두려웠을 것이다. 입으로 뱉어내고 나면 생각이 말이 되어 기정사실화 돼버리고 마는 것이니까.. 차라리 확실한 병명을 듣기보다 자신이 떠나고 남겨질 친정 아빠를 향한 아내로서의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사랑의 마음을 담아 엄마의 걱정스러움을 대신 남기시고 싶으셨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고 하나부터 열까지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기 전에 죽고 싶다고 늘 말씀하시던 엄마는 수술 전 병실에서 아빠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린아이가 엉엉 소리 내어 우는 것처럼 서럽게도 우셨다.
“끼니 거르지 말고 잘 드시고 뎅기쇼~”
“나 없다고 후줄근하게 옷 입고 다니지 말고 깔끔스럽게 하고 다니쇼”
“자식들한테 폐 끼치지 말고 짐 되게 살지 마시오”
“더 나이 들면 요양원 같은데 알아봐서 들어가고 자식들한테 빚은 남기지 말고 요양원에 들어갈 만큼은 벌어놓으시오~”
자신의 남은 시간에 대해 정리하는 엄마는 당신이 떠나고 난 후 남겨질 평생의 동반자인 남편인 우리들의 아버지를 향한 걱정뿐이셨다.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우리 자식들에게는 오히려 껄껄 웃으며 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셨지만 70세도 안 된 나이에 생을 달리한다는 건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고독과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을 떠올리며 세상과의 원망으로 치열한 밤을 보내셨을 것이다.
가끔 엄마에게 엄마 아프셨을 때 어린애처럼 아빠를 보자마자 울면서 사랑한다고 하셨으면서 지금은 살아나셨다고 왜 그렇게 다투시냐고 놀리면 그때는 마지막이다 생각했고 “네 아빠 얼굴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 서럽고 미안해서 그랬다”라고 하시지만 어쩌면 매일매일이 우리에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날들임을 그날 이후로 우리는 '죽음'이란 단어가 언제 어느 때고 찾아올 수 있음을 가슴에 안고 살게 되었다.
가끔 엄마에게
“엄마, 가장 무섭거나 슬픈 일이 뭐야?”
“우리 새끼들하고 다시는 못 보고 헤어지는 거.”
지금도 엄마의 모든 움직임에는 자식들과 아버지만 남아있다.
큰 수술을 두 번이나 하셨던 엄마를 보면서 인생에 밀려오는 불행에서도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는 의지, 소소한 일상을 즐겁게 만들어가는 지혜를 닮을 수 있다면 죽는 순간까지도 현명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쁜 일 끝에는 다시 좋은 일이 찾아올 테니 정해진 하루치 시간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아무쪼록 잘 먹고 잘 자고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던 엄마를 닮아야 하는데ᆢ자꾸만 뒷걸음치는 인생이 되는 것 같아 나 스스로에게 미안해지기도 한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죽음을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는 편이 좋다고 한다. 삶과 죽음 사이의 어딘가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들에게 잠깐의 쉼의 시간도 필요하다. 몸은 바쁘고 할 일은 많아지는데, 이유 없이 무기력해지는 까닭을 찾다가 문득 8년 전 많이 아팠던 엄마를 떠올리며 함께할 수 있는 지금의 소중함을 되새김질하니 다시 힘이 난다. 엄마의 힘은 그래서 대단하다.
며칠 전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추석 때 집에 오라고 하신다. 며칠 친정에 머무르면서 엄마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비금도에 다녀오자고..
"너랑 한번 가고 싶다. 바람도 쐴 겸. 시간 낼 수 있겠냐?" 엄마의 목소리에 그리움의 표정이 느껴졌다.
"네.. 1주일 정도 정읍에 있을게요"
엄마 나이 열여덟에 떠난 고향이었다. 외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엄마는 한 달에 한 번씩 비금도를 다녀오셨다. 거동이 불편한 외할머니 목욕을 시켜 주시며 "제발 자식들 고생 그만시키고 이제 그만 가시쇼.." 굽은 할머니의 등이 빨개지도록 밀어주시던 엄마는 눈물 고인 붉어진 눈을 연신 비비셨다.
외할머니는 오랜만에 찾아온 막내딸의 매서운 한 마디가 화살처럼 박히셨는지.
"내가 빨리 죽어야 우리 새끼들 고생 안 할 것인디..미안허다" "살갗이 아프다. 살살 밀어다오"
엄마의 매서운 손길이 닿을 때마다 외할머니는 살갗이 아픈 게 아니라 막내딸의 한숨이 아프셨을 것이다.
한숨 쉬듯 내뱉던 외할머니의 굽은 등 너머로 보이던 엄마의 입가엔 꾹꾹 참고 있는 슬픔이 짓눌러져 있었다.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고 찾아갔을때 외할머니는 나를 안으시며 "우리 서윤이가 어느새 이렇게 컸느냐며 눈물을 보이셨던 모습이 내 기억에 나아있는 외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다.
외할머니를 떠나보내면서 엄마는 많이 울지 않으셨다. 그저 잠시 이별인 것처럼 초연하게 받아들이시는 모습을 보며 그 밤의 엄마를 떠올렸었다. 거동이 불편하신 엄마가 더 이상 며느리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딸자식으로서의 마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스스로의 일상을 견디실 수 있을 때 떠나시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외할머니의 나이에 접어드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찬서리처럼 매서웠던 그때의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갑자기 나와 비금도를 가고 싶으시다는 엄마는 어쩌면 추운 욕실에서 빨갛게 등을 내주었던 그 밤의 외할머니가 보고 싶으신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추석은 엄마의 기억을 헤아리며 정겹게 엄마와 단둘이 서로의 시간을 붙잡아보련다. 뜨거운 태양이 물러간 엄마의 고향 비금도에서 30여 년 전의 추억 한 자락을 꺼내며 엄마의 그리움에 나의 그리움도 얹어보려 한다.
가족의 죽음이 생소하고 막연히 두려운 사람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고 싶었던 오래전 나의 꿈 얘기도 나누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