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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드 큐레이터 서윤 Mar 13. 2023

호박꽃이 피었습니다.

추억 한 끼 꽁보리 비빔밥

 3월, 4월은 미나리가 한참 맛있을 때다. 주말 게으름을 부리다 엊그제 사다 놓은 여린 미나리 한단이 떠올랐다. 달래 김치도 있고 마침 잘 익은 배추김치도 있어서 양푼을 꺼냈다. 아침에 아들이 먹다 남기고 간 불고기에 미나리를 가위질로 쫑쫑이 자르고 양푼에 밥을 소복이 담았다. 도마와 칼도 꺼낼 필요 없이 가위질로 대충대충 잘라 참기름을 두 바퀴 돌리고 손맛 좋은 직원이 챙겨준 꾸지뽕 고추장 한 스푼을 넣어 쓱싹쓱싹 비볐다. 마침 계란은 떨어지고 없어 통깨를 손바닥으로 비벼 넣어 고소함을 더했다.


기억은 ‘뭔가를 기록하거나 외워서 잊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추억은 ‘어떤 기억을 뒤쫓아 가거나 그 기억을 사모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어린 시절 우리 할머니는 유달리 나를 예뻐해 주셨다. 다른 손주들도 많았지만 방학때마다 나를 돌봐주시면서 정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고생하는 막내아들 내외의 군입 식구라도 덜어주고자 4남매의 맏이인 나만 시골집에 내려오라고 하셨다. 당신 자식 얼굴 한 번 더 보길 원하는 마음을 손녀딸인 나를 챙겨주시는 것으로 대신했던 것 같다.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어렸을 때 할머니가 챙겨주시던 그 마음이 반의 반만큼 정도는 알 것만 같다.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그 시절에는 먹을 것이 그다지 많이 없었다. 텃밭에서 나오는 작물이 고작이거나 한 달에 몇 번 안 서는 시골 장터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사야만 했다. 할머니는 방학 때마다 시골 살이를 갔었던 나를 데리고 제일 먼저  장터부터 가셨다. 첫 번째로 들른 곳은 언제나 샌들을 파는 신발 가게였다. 또래보다 키가 쑥쑥 자랐던 나에게 장사하느라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방학 때마다 발에 맞는 신발부터 챙겨주셨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녀딸에게 예쁜 샌들을 신기고 싶었던 할머니는 또래보다 발이 큰 나에게 속상하신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시고는 했다.

“뭔 놈의 지집애가 이리 발이 크다냐!”

“니 애비 돈 벌어서 딸자식 신발 사주다가 볼일 다 보겄다”

그렇게 시작된 시골 장터에서의 할머니와의 나들이는 늘 훌쩍이며 끝을 맺었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서 내 손에 들려 쥔 엿가락은 어느새 녹아 있었고 할머니는 그렇게 잠든 내가 안쓰러운지 살짝 굽은 등에 업고 있던 나를 퇴청 마루에  뉘이고 낮잠 이불을 꺼내 배 위에 덮어주고는 불린 보리쌀로 가마솥밥을 해주셨다.


그즈음 담장 밑에는 노랗게 핀 호박꽃이 피고 난 자리에 연한 초록빛 호박이 달려 있었다. 그중에 제일 연한 호박으로 짭짤한 시골 막된장을 넣고 다른 야채는 없으니 막따온 여린 호박을 숭덩숭덩 썰어 놓고  겉껍질을 일일이 벗긴 호박잎을 듬성듬성 썰어 넣고 국인지 찌개인지 모를 된장국이 끓여지고 나면 그때부터 할머니의 손끝은 분주해졌다. 밭에서 따온 보랏빛 가지를 모락모락 김이 나는 보리밥 위에 쪄내어 투박한 손으로 길쭉길쭉 찢어서 집 간장으로 조물조물 무치고, 텃밭에 키운 부추와 깻잎은 곱게 채를 썰어 놓으셨다. 할머니는 투박한 주걱질로  커다란 양푼에 찰기 없는 꽁보리밥을 골고루 담으셨다. 그리고는 작년 가을에 담가 두었던 무짠지의 짠맛을 빼고 곱게 다져서 참기름 한방을 떨어뜨리고 그 위에 부추 무침과 깻잎, 가지 무침을 내 입 크기만큼 작게 잘라 올린 뒤 후다닥 담벼락으로 가셨다. 수줍은 듯 노랗게 핀 여린 호박꽃을 따오셔서 분 날리는 수술을 떼고 손으로 툭툭 털어낸 뒤 가마솥 열기로 살짝 쪄서 야채들이 올려진 꽁보리밥 가운데에 무심한 듯 올려주셨다.

“우리 강아지 많이 묵어~~

쑥쑥 커야 이 담에 할미도 업어주지~~”

그렇게 할머니의 손끝을 거친 호박꽃은 어린 내 입꼬리에 함박웃음이 달릴 만큼 달디달았다.


자연의 리듬에 따라 제철에 나는 음식은 우리 몸에 가장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해 준다.

과거 선조들은 “약을 쓰기 전에 먼저 음식으로 치료하고 그것이 안될 때 약을 사용하라”라고 하실 만큼 제철에 나오는 음식은 보약이 되고 우리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

매일 밤마다 엄마가 보고 싶어 꿈속을 헤매던 오줌싸개 손녀딸에게 노란 호박꽃이 어쩌면 필요한 보약이 되리라는 걸 할머니는 알고 계셨을까? 손녀를 위한 할머니의 손맛으로 그려진 깡보리 비빔밥에 호박꽃이 참 많이 그리운 날이다.

미나리 양푼비빔밥을 먹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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