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창김을 구웠다. 생으로 구워 달래장으로 얹어 먹다가 오랜만에 참기름과 들기름을 2:1 비율로 섞어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곱창김 위에 바르고 구운 소금을 솔솔 뿌려 구웠다. 바삭바삭하면서도 질기지 않고 씹을수록 단 맛과 감칠맛이 느껴지는 곱창김에 엊그제 엄마가 보내주신 묵은지를 씻어 밥 위에 올려 곱창김으로 감싸 한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씹을수록 묵은지의 사각사각 씹히는 새콤함과 고소한 김 향이 어우러져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곱창김은 원초가 곱창처럼 길고 구불구불하다고 해서 생겨진 이름이다.
10월에서 11월 경까지 나오는 한 해의 첫 김으로, 1년 중에 3주 정도만 생산하는 귀한 김이다.
그래서인지 일반 돌김 보다 맛과 향이 좋다.
곱창김을 먹을 때마다 어릴 때 연탄불에 김구이를 담당했던 옛 시절이 생각이 난다.
엄마는 스무 살 꽃처럼 아름다운 나이에 첫 딸인 나를 낳고 줄줄이 동생들을 낳으셨다. 아버지는 가끔 술에 취한 날이면 그 옛날에 엄마의 노란 원피스 입은 모습에 반해 한참을 공들인 끝에 결혼을 하셨다며 엄마가 정말 에뻤다는 넋두리를 하시곤 했다. 요샛말로 살림 밑천인 나를 뱃속에 먼저 장만하고 신접살림을 차리신 두 분은 서로 사랑한 만큼 싸움도 잦았다. 어릴 적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주위에 여자들이 많이 꼬였었다. 가끔씩 엄마는 꼭 다문 입을 도통 열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럴 때마다 집안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걷듯이 온 식구가 조심조심 엄마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흡사 폭풍전야 같았다. 그럴 때면 아버지 또한 무슨 잘못을 하셨는지 엄마 눈치를 보느라 좋아하시던 막걸리도 자제하고 집에 일찍 귀가하셨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그만 좀 화 풀면 안되겄는가"라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엄마는 서릿발 같은 쌩한 찬 기운으로 아버지를 째려보셨다. 밥상머리에서 오고 가는 부모님의 설전을 들으며 나와 동생들은 눈칫밥을 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엄마의 표정을 살피는 나에게 엄마는 곱창김을 꺼내 구우라고 하시며 기름장을 만들어 건네셨다. 참기름에 생 들기름을 섞고 구운 천일염을 갈아서 섞어 놓은 기름장을 곱창김 앞 뒤에 골고루 발랐다. 연탄불 위에 석쇠를 앉히고 적당히 살짝살짝 춤사위를 벌이듯 노릇노릇 타지 않게 구워냈다. 엄마의 눈치를 보며...
그런데 엄마는 간밤에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얼굴에 살짝 미소마저 짓고 계셨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조기구이도 함께 구우셨다. 며칠간 엄마의 눈치만 보던 아버지는 천하를 얻은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해져 있고 나는 도통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기만 했었다. 엄마는 잘 구워진 곱창김에 따뜻한 밥 한 수저를 올리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묵은지와 함께 싸서 아버지의 입 안에 까지 넣어 주셨다. 잘 먹어야 건강하다며 묵은지가 짜지는 않는지, 조기구이는 알맞게 익었는지도 살피며 통통한 조기 살을 발라 아버지 밥 수저 위에 올려 주셨다.
나중에 알았다. 엄마는 아버지로부터 사랑하는 여자로 대접을 받았을 때 최고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는 것을. 밤새 스무 살의 가슴 떨렸던 첫사랑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버지의 따뜻한 속삭임으로 인해 누구의 엄마가 아닌 사랑하는 한 남자의 여자로 행복했을 것이다. 아버지를 위한 밥상을 준비하시던 그날의 엄마 미소는 가끔 우리들에게 놀림감이 되곤 하지만 엄마의 마음을 아내가 되어보니 알겠더라. 여자이고 싶었던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