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마법 국수

#추억 한 끼


시골 부엌 찬장 안에 숨겨진 백설 같은 설탕은 한 번씩 엄마가 보고 싶어 훌쩍이는 손녀딸을 위한 할머니의 마법 가루였다. 때 묻지 않은 하얀 국수 가닥을 삶아낼 때 할머니의 모습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듯 정확했다. 구수한 멸치 육수를 붓고 소박하게 깨소금 간장 등 소박한 양념을 올리기도 하고, 때로는 쫄깃한 국수에 설탕물을 말아 내 입에 넣어주시기도 하셨다. 하얀 설탕은 할머니가 손녀에게 보내는 큐피드의 화살이었다. 더위에 지쳐 입맛이 뚝 떨어질 때면 할머니가 해주시던 그 설탕 국수가 생각난다.

할머니는 나하고 노는 시간보다 우물가에 놓인 돌절구와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빨갛게 익은 생고추를 돌절구에 드륵드륵 갈아 시원한 열무물김치를 만드시고는 우물 안에 끈으로 매달아 김치통을 넣어두고 새콤하게 익을 때쯤 시원한 열무국수를 말아 주셨다. 칼국수부터 콩국수·냉면·막국수·스파게티·가락국수·자장면·라면 등, 많은 면 요리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내 입에는 적당히 익은 열무국수만 못하다.

어떤 식자재와도 잘 어울리는 국수는, 달빛 기나긴 밤에 식구들의 야식으로 그 활약이 대단하다. 빨리 조리할 수 있고 솜씨만 발휘된다면 수백수천 가지의 얼굴로 변신하는 천의 얼굴을 가진 매력덩어리 식재료가 분명하다.

하루는 직장에서 잦은 실수로 유난히 풀이 죽어 있는 아들에게 고추장, 간장에 매실액, 식초와 깨, 오이채, 청양고추 조금 다져 넣고, 속을 달래줄 달걀 반 개 올려서 새콤달콤 비빔국수를 만들어 주었다. ‘후루룩 후루룩’ 면발 끌어올리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경쾌하게 들리는 걸 보니 아들의 마음도 맛있는 국수처럼 한결 편안해짐이 느껴졌다.

어느 시인은 밥 한 사발 속에 우주가 있다고 했다. 한 사발의 밥에 스민 따스함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하나의 낟알이 만들어지기까지 공기와 물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부지런한 농부들의 땀과 공력, 그리고 우주의 기운까지 더해질 수 있을 때, 그렇게 내가 매일 먹는 밥 한 끼는 고단한 농부의 수고와 우주의 기운을 먹는 것이고 나누는 것이다.


한 끼 식사로 손색없고 한밤의 훌륭한 야식이 된 국수 한 그릇으로 정감 넘치는 추억이 4대의 울타리에 든든한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내일은 얼음 동동 띄우고 토마토 한 조각 올린 달콤한 할머니 표 설탕 국수를 해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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