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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드 큐레이터 서윤 Apr 26. 2023

을씨년스러운 마음을 봄나물로 채우다.

추억 한 끼 -아들을 위한 봄나물 브런치

며칠 동안 멘털이 흔들려 책도 읽히지 않고, 글도 써지지 않아 힘들었다.

감정이란 내 안에서 일어나고 만들어지는 것인데 자꾸 내가 아닌 타인에게서 이유를 찾으려 했다.

불편한 감정들과 섭섭한 마음등이 합쳐져 우울이라는 단어를 끌어안고 있었다.

치울 것 없는 부엌살림들을 꺼내 여기저기 수납 자리를 바꿔주고 조금씩 남겨져 있던 냉장고 음식들도 모두 비워내고 나니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역시 마음이 복잡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 답이다.


'최고'의 비교대상은 타인이지만 '최선'의 비교 대상은 항상 나 자신임을 깨닫는다.

그 경계선을 놓칠 때마다 우울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누구의 평가가 중요한 게 아닌데 말이다. 

복잡했던 감정들을 실타래로 꿰듯 하나하나 점검하고 나니 결국 답은 내 안에 있었다.

내가 아닌 타인을 이상화시키고 있었다는... 나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채우기 위해 타인에게 나를 낮추고 있었다.


놓치고 싶지 않은 관계일수록 심플하게 다가서야 함도 알게 되었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존중하고 존경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는 것도, 다른 이의 평가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꾸준히 챙겨가며 키워야 하는 과정들이 필요하다는 것도...

부패가 아닌 발효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내며 나를 책임지고 단련시키며 신념을 키워야만 한다고..


며칠간 속앓이를 하느라 소홀했던 아들의 밥상이 마음에 걸려 장을 보았다.

향긋한 봄나물이 먹고 싶었다. 아들에게는 닭볶음탕을, 나는 봄나물죽이라도 끓여 며칠 동안 허기진 속을 달래주고 싶었다. 갖가지 진열된 봄나물들을 분주하게 카트에 담아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미 나의 머릿속은 봄나물 밥상으로 채워졌다. 친정엄마가 보내주신 들기름에 한약재를 넣어 숙성시킨 빛깔 좋은 고추장도 떠올렸다.


울릉도 취나물이라고도 불리는 부지깽이나물은 울릉도에서만 자생하다가 요즘은 어디서나 키우고 있는 나물이다. 부지깽이의 뿌리는 천문동이라 하여 한방에서 약재로 쓰일 만큼 몸에 좋은 봄나물 중에 하나이다.

지금은 계절 상관없이 울릉도 농산물 홈페이지등에서 냉동으로도 구매가 가능하지만 제철에 먹는 나물 맛에는 못 미친다.

다래순은 누룩소금과 들기름으로 무치고 부지깽이나물은 고추장으로 무치고 부족한 간은 집간장으로 채웠다.

새발나물은 고춧가루에 맛간장을 넣고 버물버물 살포시 무쳤다. 

편식 심한 아들내미에게 어떻게든 나물을 먹이고 싶어 봄나물 브런치를 만들어 주었다.

발효빵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어제 사다 놓은 식빵을 굽고 계란 프라이, 한라봉과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만들어 대령했다. 제철 나물을 맛이라도 보게 하고 싶은 어미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이렇게 먹으면 돼요?"라고 묻더니 군소리 없이 식빵에 황매실쨈 조금 바르고 부지깽이나물을 올려 먹는다. 후다닥 커피로 입가심을 하고 한라봉으로 입가심을 하며 얼굴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망아지처럼 온통 찌푸렸지만 차려준 한 접시를 어떻게든 다 비워 주었다. 거기다 먹는 모습의 포즈까지 잡아주라며 카메라까지 들이대니 기가 찼는지 웃는다.

"크~ 이 맛에 밥상을 차리지~"뿜뿜 어깨춤까지 추며 리액션을 해주니 스물여덟 아들은 그런 엄마가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잘 먹었습니다~"로 회답하고 출근을 했다.


그래, 이렇게 또 하루를 살아내면 된다.

무엇보다 나와 내 사람들에게 한 번의 웃음이라도 주며 즐겁게 살면 되지 싶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지만 아들의 미소 덕분에 나의 하루는 충분히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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