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드 큐레이터 서윤 Jul 05. 2023

초록빛 향긋한 미나리 밥새우전

할머니의 추억 한 끼 밥상

"미나리는 아무 데나 심어도 잘 자란단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나 뽑아 먹을 수 있어."

영화 미나리에 나오는 대사이다.


'물에서 자라는 나리'라는 뜻의 미나리는 논과 밭, 하천이나 개울가, 천변에 뿌리만 있어도 어디에서든 잘 자라는 생명력이 강한 미나리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어릴 적 시골집에서 함께 지내던 친할머니 덕분이다.


할머니는  함께 지내며 엄마가 보고 싶다고 떼를 쓰는 어린 나를 달래기 위해 놀잇감을 만들어 주셨다.

뒷마당 우물 옆에 장독대 한편 그늘진 곳에 제일 큰 항아리 뚜껑에 물을 담고 미나리를 키우게 하셨다.

개울가에서 자라고 있던 늦은 봄 미나리를 캐와 뿌리를 물에 담가 놓으면 며칠마다 한 움큼씩 여린 초록빛으로 얼굴을 내밀어 주던 미나리가 신기해  아침마다 눈인사를 하며 키우는 재미에 홀딱 빠지게 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자란 미나리로 어린 나를 위해 여름 물김치를 담가 주기도 하셨고, 깻잎과 함께 송송 썰어 미나리 전을 부쳐 주시기도 하셨다.

가끔 나를 보러 들르시는 아버지에게는 "우리 서윤이가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 미나리가 쑥쑥 잘 자란다"며

매콤한 청양고추 듬뿍 썰어 넣고 고추장떡을 부쳐 주시기도 하셨다. 영화 '미나리'를 보고 난 후 할머니가 해주시던 미나리 전이 떠올라 며칠 동안 미나리 전만 해먹을 때도 있었다.


제대로 장맛비가 쏟아진 날, 낮에 창신동에서 홍어무침 레시피를 전수해 주고 남은 미나리로 집에 오자마자 전을 부쳤다.

냉동실에 있던 밥새우를 꺼내 마른 팬에 볶다 보니 지붕 위에 쏟아지는 빗물처럼 타닥타닥 빗소리가 난다.

미나리의 억센 줄기는 나물로 만들어 아들을 위한 미나리나물 김밥을 만들고, 여린 미나리 잎은 송송 썰어 어릴 적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것처럼 깻잎, 당근채, 얼큰한 청, 홍고추를 다지듯 썰어 넣고 밥새우와 섞어 미나리 전을 부쳤다. 부드럽고  짭조름  밥새우가 신의 한 수다. 죽을 프라이팬 위에 올릴 때마다 지글지글 부쳐지는 소리는 잠시 빗소리를 연상케 한다. 전이 익어가는 소리와 고소한 기름 냄새만으로 입 안에 군침이 돈다.  바삭하게 볶아 넣은  밥새우가 들어가 더 고소한 미나리 전이 되었다.

아들에게는 밥새우 대신 베이컨을 올려 주었다.

비 내리는 밤, 향 좋은 수제 막걸리와 함께 따뜻하고 지혜로웠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추억 한 끼 밥상의 페이지를 이렇게라도  기록으로 남겨 본다.

작가의 이전글 낯선 동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