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드 큐레이터 서윤 Jul 17. 2023

실연의 아픔 극복하기 프로젝트

ㅡ추억 한 끼 구기자 닭백숙

어린 시절,

할머니는 막내아들이 시골집에 갑자기 나타나실 때마다  밥상이 부실할까 싶어 한 동네 큰 집에 다녀오시곤 했다.

"왜 말도 없이 오냐. 전갈이라도 미리 해주면 찬거리라도 준비했을 것인디.."

아쉬운 마음에 쪽머리를 한 할머니는 종종걸음으로 그렇게 허겁지겁 뒷모습을 남긴 채 달려가듯 뜀박질을 하시며 사라지셨다.


그러고 잠시, 방금 전 까지도 시골 앞마당이 자기 영토인 양 이리저리 먹잇감을 찾아 헤매고 다녔을 토종닭 한 마리가 축 늘어진 채 할머니의 손에 들려 있었다. 굳이 한 동네 큰 집까지 가서 닭을 잡아왔던 수고로움은 시골집에서 키우던 장닭을 잡는걸 보고 난 뒤 한참을 울면서 "내 닭 내놔~ 내 닭 내놔"라고 몇 날 며칠 떼쓰며 울었던 손녀를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할머니는 대파와 무를 넣고 몇 가지 한약재들을 씻어 가마솥에 안치시고 땀을 뻘뻘 흘리시며 불을 지폈다. 그렇게 끓여낸 육수 안에 손질한 토종닭과 닭발, 똥집, 그리고 닭의 간까지 모두 넣으시고 끓이셨다.

백숙이 익어가는 동안 텃밭에 있던 쪽파를 뽑아서 돌절구에 붉은 고추를 드륵드륵 갈아 속이 덜 찬 여름 배추와 함께 겉절이 같은 물김치를 담으셨다.


검은 가마솥 안에서 솔솔 하얀 수증기가 바람을 일으키면 할머니는 불타던 장작 몇 개를 빼놓으시며 불을 줄이고,

불린 찹쌀과 녹두를 담은 베보자기를 싸매고 익어가는 닭백숙 옆에 넣으셨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통마늘은 토종닭 배 안에 가득 숨겨 놓고 마늘을 싫어하는 나를 위해 감자를 큼직큼직하게 썰어 넣으셨다.


우리 아들 고생하는데 차린게 없다며 "다음에 올 때는 미리 기별이라도 해 다오" 한 마디 하시며 잘 삶아진 닭다리 두 개를 아버지 접시에 담아 주셨다. 시골에서 지내고 있는 어린 딸을 잠시 보러 들르신 아버지였지만 할머니의 밥상을 받으며 "우리 어므니 밥이 먹고 싶어 왔죠" 쑥스러운 듯 한마디 던지시고는 괜스레 나에게 "할머니 말씀 잘 들어라. 안 그러면 영영 집에 안 데리고 갈 거니까"라는 엄포를 놓곤 하셨다. 여름철이면 시골집에서 할머니와 지내던 어린 딸내미와 어머니를 가끔 그렇게 불쑥 찾아오던 아버지와 함께 먹었던 추억의 음식들이 어쩌면 지금 내가 차리고 있는 밥상에 몇 백 번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랜만에 할머니가 끓여주셨던 비법대로 토종닭으로 구기자 백숙을 끓였다. 구기자도 넣고, 감자도 넣은 할머니 백숙처럼...

실연의 상처를 안고 시무룩해 있는 큰아들을 위한 보양식으로..

먼저 토종닭에 함께 포장되어 있던 한방 재료와 대파 몇 뿌리, 생강을 넣고 충분히 끓여 육수를 낸다. 닭의 똥꼬 지방도 말끔히 제거하고 배 속 내장 찌꺼기와 남아있는 잔여물들도 젓가락으로 파내어 깨끗하게 손질해 준다. 그렇지 않으면 닭 비린내가 나기 쉽다. 손질한 토종닭 배 안에 할머니가 만들었던 것처럼 통마늘로 반쯤 채우고 토막썰은 감자도 넣어 채운다. 그리고는 닭다리로  야무지게 여며 모양을 잡아준 뒤 끓이고 있는 육수에 한방 재료를 모두 건져내고 황기 한 줌과 구기자 두어 줌 , 그리고 씨 뺀 대추 10알 정도 넣어 주었다. 중간쯤 불린 찹쌀과 녹두 주머니를 넣고 1시간 반 정도 끓여 주었다. 그 사이 알배추 겉절이를 만들고 아들을 맞이할 준비를 끝냈다.


여름철이면 아이들에게 많이도 해 먹였던 음식 중 제일 좋아했던 메뉴이기도 하다. 나중에 할머니 비법대로 백숙집이나 차려볼까 싶을 만큼 매번 만들어 먹을 때마다 할머니가 그리워지는 맛이다.


밤늦게 퇴근하고 돌아온 아들은 두 그릇 같은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며 땀을 흘렸다. 속상한 아들의 마음이 땀샘으로 다 빠져나가길 바라며 밥 한 끼로 엄마 마음을 보탠다.


#엄마밥상

#할머니의 추억한 끼

작가의 이전글 하나를 비우고 하나를 맞이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