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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드 큐레이터 서윤 Aug 15. 2023

기다림이 지루할 때

달짝지근하고 구수한 늙은 호박 된장찌개


인생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일인 것인가.

괜스레 혼자 밥상을 마주하기 싫은 날..

누군가와 함께 나란히 앉아 생선 가시도 발라주며 밥 숟가락 위에 김치 한 조각 올려주고 뜨끈한 된장찌개 한 수저 떠먹으며 마음이 포근해지는 그런 추억 한 끼를 만들고 싶어지는 날이다.


어렸을 적, 아버지는 해마다 겨울이면 제주에서 밀감 선과장을 하셨다. 긴 겨울이 끝날 때쯤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를 목 빠지게 기다렸던  옛 기억을 끄집어 내본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손에 들려진 커다란 짐 가방에 분명히 나와 동생들의 선물이 있을 거라는 대단한 상상을 하며 아버지의 가방을 풀어헤쳤었다. 그러나 가방을 연 순간 어린 우리들의 기대는 산산조각 흩어져 버렸다. 커다란 가방 안에는 한 겨울을 지내고 난 아버지의 허름한 겨울 옷가지들과 외할머니가 보내주신 된장 항아리, 그리고 그 시절 남들은 구경도 못하는 배에서 직접 말린 제주 한치 서너 축이 담겨 있었다. 동생들과 "이게 뭐야! 선물도 없고 " 시큰둥해하는 동생들에게 아버지는 "우리 새끼들 얼마나 컸나 보자"며 동생들을 돌아가며 천장 끝까지 우주선을 태워 주시곤 하셨다.


그 사이 엄마는 작은 부엌을 분주히 오가며 아버지를 위한 밥상을 차리셨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곱창김을 연탄불에 굽고 석유냄새가 나는 곤로 위에서는 보글보글 된장찌개가 끓고 있다. 늙은 호박을 듬성듬성 굵직하게 썰어 넣고 나박나박 무도 썰어서 굵은 멸치와 매콤한 청양고추를 어슷 썰어 넣으셨다. 옆집 채소 가게에서 팔고 남은 두부 한 모를 깍둑썰기해서  뚝배기가 넘칠 만큼 넣으셨다. 구수한 청국장 한 수저와 아버지 편에 외할머니가 보내주신 오래 묵힌 된장 두 세 숟가락을 넣으면 달짝지근하면서도 묵직한 외할머니표 된장찌개가 완성되었다. 아버지를 위한 밥상은 어쩌면 엄마의 보고픈 친정엄마를 떠올리는 추억 한 끼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된장찌개에 알싸한 청양고추를 꼭 넣으셨던 엄마를 닮아 나도 된장찌개에 청양 고추를 꼭 넣는다. 그렇게 알싸한 매운맛이 담긴 된장찌개를 먹다 보면 때때로 한 시절을 보낸 그리움을 소환하기도 한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것처럼 우주선을 태워 주시던 아버지의 젊은 날과 그 시절 남편을 기다렸던 마음을 담아  달그락달그락 주방에서 부산하게 움직이시던 엄마의  뒤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리운 추억 한 끼에 주파수를 찾아 맞추게 되는 매콤하고 알싸한 된장찌개 한 그릇이 오늘따라 유난히 그리워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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