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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드 큐레이터 서윤 Aug 16. 2023

그리움이 그리울 때

-엄마가 끓여주던 누룽지 한 그릇의 위로

눈물이 그리워지는, 한 번 울고 나면 속이 좀 풀리고 시원해질 것 같은 날이 있다.

밀려오는 감정이 모두 외로움이라는 종착역으로 가 닿으려고만 애쓰는 것 같아서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그런 날. 하나도 괜찮치 않을 때, 기억 저 편 어디쯤에 있는 그리운 추억 한 끼를 떠올리며  혼자만의 밥상을 차린다. 잘 참아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과거에 혼란의 시간이 잠시 잠시 찾아올 때면 끊임없이 그리움이 몰려온다. 쓰나미처럼..


눈물도 감정도 너무 메말라 버린 삶에 괜히 심통이 나는 우울한 날이면, 엄마표 누룽지를 꺼낸다. 

어릴 적 엄마는 늘 누룽지를 만드셨다. 연탄불이 제법 사그라들 무렵, 삼발이를 올리고 그 위에 낡은 프라이팬을 얹는다. 보온밥통이 없을 때라 식구들이 먹고 남은 냄비 밥에 물기를 조금 더한 후 약한 연탄불 위에서 꽤 긴 시간 동안 은근히 눌려 누룽지를 만들어 두셨다. 그렇게 눌린 누룽지를 튀기고 설탕을 솔솔 뿌려 우리들 간식으로 챙겨 주시기도 하셨고, 술 드신 다음 날 아버지의 해장으로 눅진하게 누룽지를 끓여 어리굴젓이나 바지락 젓갈 한 종지와 함께 밥상을 차리시기도 하셨다. 가끔씩 배앓이를 자주 하는 나에게도 보드랍게 끓인 엄마표 누룽지 한 그릇은 아프던 배가 쓰윽 괜찮아지는 명약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나도 누룽지를 비상식량처럼 꼭 쟁여 놓는다. 소화기가 예민했던 큰 딸아이가 수험생활을 할 때에도 누룽지는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되어 주기도 했다. 


엄마의 누룽지 비법은 최대한 얇게 펴 바른 밥이다. 눌리는 시간과 불 조절이 관건이라고 하셨다. 마음이 급하다고 불의 세기를 조금이라도 강하고 세게 하면 까맣게 타기 십상이었다. 전기밥솥이 나온 뒤로는 숭늉을 대신하기 위해 일부러 누룽지를 눌려 놓으시곤 하셨는데 아마도 아버지의 건강한 밥상은 정성이 담긴 엄마표 누룽지 덕분일 것이다. 간 밤에 아무리 부부싸움을 크게 하셔도 아침 밥상에 숭늉은 꼭 챙기셨던 엄마셨다. 그게 엄마의 의무라고 하시며. '난 내 도리를 할 테니 넌 너의 도리를 다 해라!'라는 아버지를 향한 암묵적인 시위가 담겨 있는...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엄마는 누룽지를 만드셔서 나에게 보내 주시고 지금까지도 아버지의 밥상에 숭늉을 챙기신다.


배 속이 뜨듯해야 살 힘도 난다고 하시던 엄마는 나에게 매일 전화를 걸어 늘 밥은 먹었는지, 밥 때는 놓치지 말라는 안부를 챙기신다.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나면 좋은 생각만 하고 살아도 짧은 인생인데 굳이 나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낼 필요가 있나 싶어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 그럴 때 든든하게 배를 채우다 보면 어느새 텐션 업이 되어 있다.  


배가 고프다. 누룽지를 끓였다. 엄마가 보내 주신 고구마순 김치와 한 끼를 챙겨 먹고 나면 또 하루를 보낼 힘이 날 것이다. 나를 위해 차려주었던 엄마 밥상의 그리움이 그리워서.. 엄마의 '밥 먹었냐' 목소리를 되새김질하며 그렇게 오늘도 엄마표 사랑을 먹는다. 우리 아이들도 나처럼 이 나이가 되면 엄마표 밥상이 그리울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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