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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드 큐레이터 서윤 Aug 31. 2023

2박 3일 남해의 여름을 남기다.

-그녀들의 수다가 남긴 할머니와의 추억 한 끼 감자 호박꽃 전

2박 3일의 뒤늦은 여름휴가를 사랑하는 그녀들과 함께 다녀왔다. 여행을 하는 동안 인연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했다. 3일 동안 내내 비 소식을 안고 출발한 남해는 우리에게 보너스 선물처럼 특별함을 안겨 주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보랏빛 일출 하늘도 보여 주었고 잠깐씩 내리던 비도 우리가 이동할 때마다 때맞춰 멈춰 주기도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정겨웠던 다랭이 마을 에서는 갑자기 내리는 소낙비를 피해 우연히 들어간 곳이 친절한 로컬 맛집이었다. 아낌없이 들어간 남해의 해물과  짭짤한 자연 해풍을 삼킨 향 좋은 부추의 궁합이 최고였던 해물 부추전도 소낙비 덕분에 맛볼 수 있었다.

낯 모르는 사람들끼리 만나 서로에게 기대하지 않고 조건 없이 바라봐주는 내 식구 같은 마음을 내는 게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에 언니처럼, 동생처럼 챙겨주는 우리들의 인연이 그래서 더 소중하게 다가다.


'한 사람이 오면 그 사람의 인생도 함께 온다'는 말이 있다.

여행은 낯선 것들로 가득한 새로운 환경에서 지내며 익숙하지 않았던 각자의 내면의 모습과 마주하기도 하고, 서로가 가지고 있는 각자의 사소한 습관들의 새로움을 서로 발견하기도 한다. 모든 여행이 완벽하고 아름다울 수는 없다. 대신 여행 중에서 보이는 서로의 취향의 결이 잘 맞는지도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래서 더욱 이번 남해 여행이 우리들 사이에 더 끈끈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우리가 함께 했던 여행길이 낯설지 않아서 고마웠다.

    

한 사람은 하늘을,

한 사람은 바다를,

한 사람은 산을 좋아했다.

서로 다른 취향이지만 산도, 바다도, 하늘도 매 순간 느끼는 자연의 황홀한 진한 감동의 크기는 매번 같았다.

서로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느긋하게 걷듯이 안단테 안단테..

가랑비에 옷이 젖는데도 가까운 동무가 되어 새벽 산책을 나섰던 우리들.

짙은 흙빛을 품은 거친 파도가 부서질 때마다 바위에 부서지는 하얀 포말을 멀찌감치 바라보며 그동안 몰랐던 각자 살아온 이야기,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를 한 토막씩 꺼내 놓으며 서로 다독여주는 시간이었다.

      

축축이 젖은 아스팔트 위 단단한 블록 틈새 사이에 꿋꿋이 올라와 있는 들꽃이 너무 대단해 보여 사진에 담았다. 언제든 마음이 심란할 때 이 사진을 꺼내 보리라. 언제 밟힐지 모르는 저 들풀도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저렇게 곧추 세우고 있는데 인간으로서 해내지 못할 일이 어디 있으랴 .

벗어나고픈 상처도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면서 여행은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또 하나 알아간다.    

정겹게 자리 잡은 텃밭에 호박꽃이 보여 펜션 쥔장께 허락을 구하고 해처럼 환하게 웃는 호박꽃을 골라 몇 송이 따왔다. 어릴 때 할머니가 해주셨던 호박꽃 전을 부쳐 보고 싶었다.


'호박꽃 안에 수술을 떼고 조심조심 흐르는 물에 씻은 뒤 감자를 강판에 갈아서 그 위에 올려 부쳐 만든 감자호박꽃 전.'


 비에 젖어 초록이 더 짙어 보이는 텃밭 가랑이에 노랗게 익어가는 호박을 보니 , 어릴 적 호박꽃으로 세상에 없던 음식들을 만들어 주시던  할머니 손길이 그리워졌다.


어린 동생들 셋은 부모님께 두고 여름 내내 나를 돌보아 주셨던 할머니는 텃밭에서 나오는 작물들로 세상에 보지 못한 음식들을 만들어 주셨었다.

가마솥에 보리밥이 뜸이 들 즈음 봉우리 진 여린 호박꽃잎을 벌려 이슬처럼 맺힌 수술을 떼고는 뜨거운 밥 위에 올려 살짝 쪄서 비빔밥에 올려 주기도 했고, 호박잎 쌈을 싸 먹을 때 호박꽃도 함께 쪄서 심심하게 만든 양념간장과 함께 밥상에 올리기도 하셨다.


담장 밑에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연초록 호박을 따다가, 다른 채소 없이 숭덩숭덩 썰어서 짭짤한 시골 막된장을 넣고 국인지, 찌개인지 모를 된장찌개 맛은 내가 아무리 끓여 보아도 할머니의 그 맛은 흉내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끓인 된장찌개와 함께 할머니는 가지나물을 잘 만들어 주셨다.


그렇게 끓인 된장찌개와 함께 할머니는 초승달처럼 휜 늦여름 늙은 가지의 껍질을 벗기고 살캉살캉 부드러운 가지의 속 살을 쪄서 가지나물을 만들어주셨다.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할머니의 비법 때문이다. 부뚜막에서 천연 발효시킨 막걸리 식초 한 숟가락과 고춧가루 조금, 조청과 국간장을 넣어 적당히 새콤한 맛의 양념간장을 만들어 넣으셨다. 할머니의 막걸리 식초 맛을 낼 수 있는 재료를 지금은 찾을 수가 없어 할머니의 추억 한 끼는 늘 나에게 그리움으로만 자리 잡는다.


가끔 갓 따온 보라색 가지를 보리밥 위에 쪄내어 할머니의 투박한 손으로 길쭉길쭉하게 찢어 오래 묵은 집 간장으로 조물조물 무치시고 마지막에 들깨가루와 들기름을 넣어 고소한 향내로 내 코를 자극했다. 가지나물을 만실 때면 비빔밥도 함께 만들어 주셨다. 커다란 양푼에 찰기 없는 꽁보리밥을 골고루 담아낸 후 어릴 때, 싫어하던 부추와 깻잎은 아주 곱게 채를 썰어 보리밥 아래 보일 듯 말 듯 깔아 주셨다. 할머니의 비빔밥 양념장은 특별했다. 겨울에 담가 놓은 짠지의 소금기를 물에 헹구어낸 뒤 곱게 다져서 가마솥뚜껑을 뒤집어 들기름을 두르고 된장과 할머니의 땀과 시간, 정성을 들인 조청을 조금 넣고 함께 달달 볶아 무짠지 쌈장을 만들어 양념장을 만드셨다. 아마도 매운 것을 못 먹는 손녀딸을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커다란 양푼에 보리밥 밑에 곱게 채 썬 깻잎 채와 부추 담고 작은 내 입에 들어갈 정도로 자른 가지나물을 올린 뒤 후다닥, 담벼락으로 가시곤 하셨다. 그때마다 수줍은 듯 노랗게 핀 여린 호박꽃 몇 송이가 할머니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렇게 따 온 호박꽃 안에 분 날리는 수술을 떼고 손으로 툭툭 털어낸 뒤 뜸 들이던 보리밥 위에 쪄낸 호박꽃을 비빔밥 위에 살포시 올린 후 나에게 주셨다.

“우리 서윤이 많이 묵어잉~~~, 쑥쑥 커야 이 담에 할미도 업어주지~~~”

할머니 손끝을 거친 정성 가득한 비빔밥 위 호박꽃은 어린 내 입에도 달았다.


자연의 리듬에 따라 제철에 나는 음식은 우리 몸에 가장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해 준다.

예로부터 “약을 쓰기 전에 먼저 음식으로 치료하고 그것으로도 되지 않을 때 약을 사용하라”라고 했다. 그래서 제철에 나오는 음식은 우리에게 보약이 되어 준다.


할머니 정성이 만든 손맛은 밤마다 엄마가 그리워 울던 오줌싸개 손녀딸에게 어쩌면 가장 필요한 보약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할머니는 알고 계셨던 것일까.

아직도 할머니의 살짝 굽은 등에 땀이 흥건하게 젖었던 오래 전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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