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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니나 Oct 09. 2021

여우와 햄스터


오르페는 내게 뉘른베르크Nuremberg 시내 곳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아름다운 중세 건물과 교회를 지났다. 고층 건물은 전혀 없었고 색색의 지붕을 가진 아담한 건물들만이 나란히 붙어 있을 뿐이었다. 정교하게 건축된 교회며 탑은 그 세밀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시내 지하에는 과거 맥주를 보관했던 창고가 있었다. 오르페는 세계 대전과 히틀러의 잔재가 곳곳에 남아 있는 마을의 특성을 가감 없이 설명해주었다.


“저기 저 건물 보이지? 로마의 콜로세움이랑 비슷하게 생긴 것. 저것도 히틀러가 욕심부려서 무리하게 만든 거야.”     



뉘른베르크 곳곳에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도시 전체가 하나의 큰 박물관처럼 느껴졌다.



악명 높은 나치당이 설치던 곳인 동시에 전범들이 엄중히 재판받던 곳. '나치', '전범' 등의 용어가 늘 따라붙는 도시인 만큼 딱딱하고 무거운 분위기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미처 버리지 못하고 있던 나는, 도시에서 느껴지는 산뜻한 기운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중세풍의 건물과 탑 덕분인지 타임머신을 타고 오래된 도시로 돌아간 느낌마저 들었다. 도시가 아름다운 것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소중한 친구가 살고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공간으로 여겨졌다.



뉘른베르크의 가이드를 자청한 오르페



오르페와 난 거창한 밤 외출을 감행했다. 멋지게 차려입고선 오르페가 좋아하는 술집들을 차례로 들러 보기로 한 것이다. 깔깔대며 밤거리를 쏘다니는 건 덤이었다. 외출 전, 오르페는 자신이 아끼는 예쁜 옷들을 바닥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예쁜 것으로 하나 골라잡아!”     


몸에 착 달라붙는 빨간 원피스부터 프릴 장식이 달린 초록색 블라우스까지, 여행 중에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던 예쁜 옷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고심 끝에 오르페가 입은 윗옷과 비슷한, 호피 무늬의 원피스를 골랐다. 오르페는 탁월한 선택이라며 미소 지었고, 우린 쌍둥이처럼 똑 닮은 옷차림을 한 채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웅장하게 서 있는 대성당을 지나 색색의 불빛이 번뜩이는 번화가로 나섰다.



쌍둥이같은 옷차림을 한 채, 한껏 들뜬 우리



첫 번째로 도착한 바의 메뉴판엔 죄다 독일어뿐이었고, 영어로 쓰인 것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르페는 독일어로 된 메뉴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 가며 프랑스어로 해석해 주었다. 워낙 종류가 다양할 뿐더러 이름을 듣는다고 해서 무슨 맥주인지 아는 것도 아니었기에, 순간적인 이끌림에 의존해 술을 주문했다. 독일어로 된 길고 어려운 이름을 소리 내서 읽어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이름도 모르는 맥주들을 좋다고 마셨다.


술집 바깥에 있는 야외 탁자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프랑스에서 함께 살았을 때 겪었던 재미있는 일화들을 풀어놓으며 쉴 새 없이 웃었다. 함께 공유한 일들이며 공통으로 아는 친구들이 많아서인지 잔망스러운 이야기로도 어김없이 웃음이 터졌다. 문득 진지해져 인종차별이나 문화 차이, 각국 간의 전쟁이나 갈등과 같이 다소 무거운 주제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도 했지만, 대체로 우린 철 없는 소녀의 기질을 감추지 못한 채 서로의 연애사를 궁금해 하거나 잘생긴 남자 종업원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시간을 보냈다.


쾌활하게 발걸음을 옮긴 두 번째 장소는 아일랜드풍 술집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곳이었는데, 가게로 들어서자마자 노래방 기계로 구식 팝송을 부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과거로 돌아간 듯한 묘한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 기대와는 다른 분위기에 당황한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바 스툴에 걸터앉았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다며 연신 머리를 긁적이던 그녀는 문득 나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예거마이스터 알아? 독일에 왔으니  잔쯤은 마셔 줘야지. 내가 살게!”     



오르페와 함께 단숨에 들이킨 예거마이스터



오르페는 독일에 온 이상 독일산 술을 마셔볼 필요가 있다며 예거마이스터 두 잔을 주문했고, 우리는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재빨리 들이키고선 깔깔대며 그 구식 바를 뛰쳐나왔다. 술집과 멀리 떨어져서야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그 술집 완전 별로였어!" 우리는 널찍한 정원이 딸린 세 번째 술집에 도달하고 나서야 흡족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적당한 수의 사람들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쾌적한 곳으로, 괜찮은 안주를 곁들여 양질의 와인을 맛볼 수 있었다. 1차 맥주, 2차 양주, 3차에선 와인까지 섭렵하며 성공적인 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는,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잠들었다.


이후로도 평화롭고 즐거운 나날들이 이어졌다. 오르페와 이미 프랑스에서 한 집에 살았던 경험이 있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인지 같이 있는 게 무척 자연스러웠다. 나는 피아노를 치고 오르페는 컬러링북을 색칠하는,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오후들이 지속되었다. 야외 수영장에서 돗자리를 펼쳐 놓고 한참 동안이나 노닥거리거나, 곳곳에 있는 맛집을 탐방하기도 했다. 오르페는 나를 ‘아기 햄스터(Petit Hamster)’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고, 나는 그녀를 ‘아기 여우(Petit Renard)’라고 불렀다.



뉘른베르크 시내 한복판에서 먹었던 스파게티 모양 아이스크림



외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늘 오르페의 가족들과 한데 모여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저녁 식사가 끝나면 흰 천을 스크린 삼아 영화를 감상했으며, 때로는 다함께 외식을 했다. 한번은 '카사블랑카'라는 이름을 가진 식당에 가서 크레페를 먹었다. 영화 <카사블랑카>를 모티브로 꾸며진 곳으로, 외벽에 영화 속 주인공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얇고 고소하게 구워진 반죽 위에 햄, 치즈, 달걀 등의 토핑을 올려 먹는 요리인 크레페는 (그 맛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르페의 가족들과 함께 있어서인지 더욱 맛이 좋았다. 오르페의 아버지인 마틴이 말했다.


"여기 오니까 영화 생각이 나는군. 집에 돌아가면 다같이 영화 <카사블랑카>를 보자고! 마침 수아도 안 봤다고 하니."


오르페네 집에 머무는 동안은 평소 그렇게 많이 찍던 사진도 왠지 찍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같이 있는 순간들에 집중하면서, 가족의 일원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따뜻한 느낌을 간직할 뿐이었다. (실제로 남아 있는 사진들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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