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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니나 Jul 29. 2022

잠깐의 오아시스



독일에서의 마지막 날. 오르페의 아버지 마틴과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되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차올라 급히 선글라스를 꼈다. 마틴은 처음 만났던 날처럼 민소매 티에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핫팬츠를 입고선 나를 배웅했다. 아쉬움이 깃든 표정이었으나, 그는 짐짓 활기찬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의 여정을 응원했다. 오르페의 집을 떠나기 전에 아무도 모르게 편지를 써 두었고, 오르페와 마틴의 눈치를 살살 봐가며 들키지 않게 곳곳에 편지를 두고 나왔다. 오르페를 위한 편지는 그녀의 책상 위에, 마틴과 유타를 위한 편지는 과일 바구니 속에 슬쩍 올려 두었다.      



오르페 그리고 마틴과 작별하던 날



뮌헨München으로 가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새벽에 뮌헨 공항에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다. 슬슬 오르페에게 작별의 말을 건네려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뮌헨까지 나와 동행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뮌헨에 친한 친구들이 있어. 함께 가서 뮌헨을 구경하자!”     


오르페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뮌헨에 도착하자마자 샬롯과 모리츠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뮌헨은 엄청난 관광 도시였다. 도시 규모도 클뿐더러 관광객들도 넘쳐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소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구경한 뮌헨 시내



키가 무척 크고 예리한 눈매를 지닌 샬롯은 우리에게 뮌헨의 그림 같은 성들이며 사람들로 넘쳐나는 시내를 구경시켜 주었고, 이내 ‘잉글리쉬 가든’이라는 이름의 공원으로 이끌었다. 알몸으로 다니는 게 법적으로 허용된 공원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알몸으로 다니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았으며, 대부분은 속옷이나 수영복을 걸치고 있었다. 자유로운 차림을 한 사람들은 공원 곳곳의 개울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우리는 다만 개울가에 앉아 차가운 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를 느꼈고, 이내 편안한 상태로 누워 막간의 잠에 빠져들었다. 슬슬 출출한 기운이 느껴질 즈음, 친구들과 함께 장을 봐서 치즈 퐁듀를 해 먹었다.     


오르페는 나를 뮌헨 공항 바로 앞까지 데려다주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눈물이 글썽한 얼굴을 맞대며 몇 번을 껴안고서야 헤어졌다. 쉴 새 없는 여행의 한복판에서 만난 오르페의 집 그리고 독일은 내게 오아시스의 기억으로 남았다. 늘 먹을 것과 잘 곳을 걱정하고, 일을 해주는 대신 숙식을 대가로 얻는 생활을 이어가던 중 들리게 된 그곳에서, 오르페는 내게 그저 푹 쉬다 가라며 토닥여줄 뿐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외출을 하고,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놀다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푹 자고, 가족들과 영화를 보거나 레스토랑에 갔던 나날들. 예기치 못한 행운이 찾아온 듯한 날들이었다.      



오르페와 함께 놀러갔던 바이로이트(Bayreuth)



작별의 감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것도 잠시뿐,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다음 목적지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Scilia였다. 밤을 공항에서 보낸 뒤 시칠리아섬의 카타니아Catania로 가는 새벽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다.      


새로운 나라로 향할 때마다 긴장으로 옥죄어오는 마음은 좀체 다스릴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내딛는 느낌이었다. 내 주변을 둘러싼 풍경이며 상황들이 짧은 주기로 휙휙 바뀌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변화했으며, 때로는 너무나 많은 인상을 한꺼번에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었다. 기록하지 않으면 모두 두뇌 사이로 뚝뚝 떨어져 내릴금방 잊히고 말 인상들을 봉인해두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일었다중요한 건 매일의 여행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일이었다     


이탈리아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밤, 두려움으로 일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힐 방도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예전에 적어 두었던 일기를 읽고 또 읽을 뿐이었다. 모로코에 도착하기 직전과 직후에 쓴 일기가 특히 위안이 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의 일기장은 걱정으로 뒤범벅이 되어있지만, 정작 목적지에 도착하고 난 이후로는 당차고 즐겁게 여행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홀로 미지의 나라로 향한다는 불안감이 절절히 묘사된 글을 읽으며, 또 언제 두려워했냐는 듯 아쉬운 마음으로 모로코를 떠났던 날을 회상하면서, 곧 닿게 될 이탈리아에서도 대단히 멋진 여정이 펼쳐질 것이라 확신했다. 늘 그랬듯이, 예상치 못한 친구들과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역시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뮌헨 공항에서. 어느새 노숙에도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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