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재수생은 트레이닝복을 입고도 반짝거렸다.
“여보세요? OO대학이죠? 며칠 전 등록금 냈는데 입학 철회하고 싶어요. 등록금 환불 받을 수 있죠?”
수화기를 잡은 손이 몹시 떨렸다. 최대한 어른인 척 낮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내 귀에도 들리는 미세한 떨림. 돈으로 절대 남을 속이는 게 아니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이 떠올라 전화를 끊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아니지 아니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문제집, 우유, 급식 등 다양한 품목으로 소소하게 부모님의 지갑을 털어오던 나름 경력직 아닌가. 여기서 물러설 수 없지. 하지만 이번에 터는 돈은 평소 잔잔하게 털어오던 단위가 아니라서 심장 박동이 제멋대로 뛴다.
약해지지 말자. ‘나 저 돈 받아서 나 서울로 뜬다.’
수능 날 최고의 컨디션이었음에도 시험을 가뿐하게 망쳤고, 당연하게도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진학하지 못했다. 대학은 몰라도 가고 싶은 학과는 명확했기에 인근 전문대에 뒤늦게 등록해 3일 정도 다녔다.
시골에 있어서인지 대학교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고, 재미도 없었다. 이럴 바에야 서울로 가서 이악물고 다시 공부하자는 무모한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그 결심은 없던 용기도 퐁퐁 솟아나게 만들었다.
3일 다녀보고 내린 나의 결정. 집에 와 읍소를 했건만 부모님은 서울에서 재수 생활은 위험하다고 반대하셨다. 서울에 가스나 혼자 가면 코를 베어간다나. 코 베어가면 입으로 숨쉬며 눈과 손으로 공부하겠다는 내 완벽한 마스터플랜을 반대하신다니 어쩔 수 없다. 안타깝지만 나 혼자 전라북도에서 탈출하겠다.
용감한 시골 소녀, 서울 언니로 다시 태어나서 서울에 있는 대학교 갈 거야.
일단 퇴학계를 내고, 통장에 돈을 받아놓고 집에 돌아왔다. 재수 계획서와 부모님 전 상서 풍의 비장한 편지를 써놓고 무작정 서울로 떠났다. 무거운 짐과 달리 내 몸과 기분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이미 약간의 흥분감이 온몸을 휘감은 상태였다. 아는 것이 없어 무서운 것도 없던 나는 일단 노량진에 도착해 보증금 없는 하숙집을 구했고, 학원에 등록했다.
출발할 때 꺼놓은 휴대전화를 열어 엄마에게 현재 상황이 낙장불입임을 알렸다. 예상대로 한 바가지의 욕과 걱정과 한숨이 돌아왔지만 호랑이의 용맹함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스무살의 내게 그런 것은 조금의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 말대로 일단 서울 이모 댁에서 상경 첫날 밤을 보낸 후 다음 날 이른 아침, 엄마를 마주했다.
엄마는 사촌들과 함께 다니며 그들의 조언에 따라 학원에서 과목을 추가 등록하고, 전날 내가 구한 곳보다 더 안전한 하숙방으로 옮겨 주었다. 하숙집을 쓱 둘러보시고는 내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침구, 세면도구, 작은 냉장고, 냉난방기 등도 하나하나 챙겨주셨다. 엄마와 좁은 하숙방에서 누워 자던 그날 밤, 옆 방들의 소음과 낯선 공기 때문인지 나는 쉬이 잠들지 못했고 엄마는 내가 잠들 때까지 내 등과 팔을 어루만져 주시며 엄마 없는 곳에서 혼자 아프지 않기만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엄마, 걱정마. 엄마 딸, 독립적인 서울 스타일 재수생으로 노량진에 우뚝 설거야!
엄마가 시골로 내려가고, 나는 본격 수험생 모드에 들어갔다. 책상 앞에 환불받은 등록금 봉투를 붙여두고 그곳에 목표를 써두었다. 나의 굳은 결심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어 고등학생 때 즐겨 쓰던 컬러렌즈 대신 눈이 1mm쯤으로 보이는 두꺼운 안경을, 멀쩡한 옷들 대신 다 해진 트레이닝복을 착용하고 학원 문을 힘껏 열며 용감하게 들어섰다. 그리고 동시에 부끄러움에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서울 오빠들이 이렇게 잘생긴 걸 알았다면 트레이닝복은 입지 않는 건데. 재수생임에도 멋이 풀풀 나는 멋쟁이 서울 오빠들이랑 눈이 마주칠 줄 알았다면 그 컬러렌즈 버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다. 유혹에 흔들리지 말자. 잘생긴 오빠들에 현혹되지 말자. 나는 트레이닝 바지를 추켜입으며 결심했다.
놀고 싶을까 봐 친구도 사귀지 않았다. 청소, 빨래, 식사 등 엄마가 대신 해줬던 것들에 대해 감사함을 몸소 깨달은 후, 외롭거나 힘이 들 땐 일기 대신 엄마에게 편지를 써가며 수험생활을 했다. 예상으론 6개월쯤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던 대학 등록금은 3개월 만에 동이 났다. 그래도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계획한 인생 안에서 작은 것들을 배워가고 있었다.
고3을 한 해 더 보내고 있음에도 성적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뜯을 때도 있었지만 스스로 계획을 짜며 공부했다.
‘올해 대학은 붙을 수 있을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데’ 불안함을 떨치기 위해 해본 적 없던 기도를 하기도 했다. 시간에 대한 개념도 생겼고, 절실하게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무언가는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재수시절은 공부를 더 했다는 느낌보다 인생을 조금 더 맛보았다는 느낌이 들었던 시기였다.
드디어 원하는 학교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은 그 날. 정들었던 하숙집에서 짐을 빼고 노량진을 한 바퀴 돌며 1년 전을 떠올렸다. ‘그 전문대학에 등록해 두기를 참 잘했구나. 흑역사라 생각했지만,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겠다.’
드디어 대학교 신입생의 봄이 왔다.
꿈꾸던 서울 언니는 되었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팍팍해 그리 멋지지는 않았다.
멋쟁이 서울언니가 되고 싶던 나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여러개의 알바를 하는 프로 노동자가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인형 탈을 쓰고 신촌 한가운데서 업체를 홍보하는 알바를 하며 돌아다녀도 즐거웠다.
마음먹으면 나는 뭐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이 마음 한켠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그해 봄 나의 자신감은 정말 번쩍번쩍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