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억지로 떠먹여준 세 가지
모처럼 밥을 잔뜩 먹고 선처럼 가만히 누워있는데 친구 별해에게서 문자가 왔다.
‘야~청암산이나 가자. 동네 뒷산 정도야. 산도 아니라구. 그냥 언덕이야.’
썩 내키지 않지만 거절 못하는 어리숙한 성격의 나답게 오케이 하고 친구를 따라나섰다. 그동안 비가 많이 와서 몸이 찌뿌둥했는데 잘되었다. 늘 걷던 수변가가 아닌 정상 한번 밟아보자. 등산화를 단단히 묶고, 물 한 병 챙겼다. 왠지 모를 자신감에 친구보다 앞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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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만한 경사는 걸을 만했다. 천천히 걸어나가다보니 이런 저런 잡념들이 퐁퐁 솟아오르다 팟 하고 터지다를 반복했다. 어느정도 걷기가 수월했던 길이 끝나고 맞이한 가파른 연속 경사길.
'아니 저년이~~' 저만큼 앞서 가볍게 걷는 친구의 뒤통수에 대고 들리지 않게 욕을 읊조렸다.
- 대체 쟤는 뭘 먹고 살길래 어떻게 날다람쥐처럼 가볍지?
- 쟤는 누구에게 지령을 받고 무슨 의도로 날 이렇게 힘들게 할까?
아무리 불평을 늘어놔도 내 앞의 오르막은 전혀 낮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힘만 빠지자 결국 나는 스스로 걸어 올라갈 수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 이래서 산짐승들이 네 발로 기어다니는 구나’
나는 짐승들의 산 생활 매커니즘을 이해하며 두 팔과 떨리는 두 다리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열 발자국 걷고 한 박자 쉬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친구가 위로랍시고 말한다.
“높은 길 먼저 보면서 지치지 말고, 그냥 바로 앞 한 걸음 내딛는 것만 봐”
“네 충고따윈 필요 없다” 호기롭게 입으로 대꾸했지만, 나는 친구의 충고대로 시선을 바꿔 한 발짝 떼는 것에 집중했다. 신기하게 덜 힘들었다.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목표와 내 앞에 펼쳐진 현실의 괴리감을 애써 보지 않으니 오히려 한 발 한 발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언젠가 저 높은 오르막 끝에 도착하겠지 라는 희망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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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도 잠시. ‘등산로를 정상까지 직선거리로 시원하게 길을 내면 안되는 거야? 법에 규정해뒀어? 왜 이렇게 사람을 뺑뺑 돌리는거야? 게다가 인터벌이야. 올라갔다 내려갔다 너무 힘들다.’ 불평을 쏟으며 걷기를 잠깐. 이제 친구와 말도 섞기 싫다. 아니 정확히는 말할 힘도 없다.
비 온 뒤라 길이 미끄러워서 등산화가 더 무겁게 느껴지나? 아니면 나풀거리는 바지가 걸리적거려서 힘드는 걸까? 나는 계속 힘든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밭은 숨을 짧게 내쉬며 천천히 걸어나가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중학생으로 추정되는 두 명이 스쳐 갔다. 아이들은 크록스를 신고 있었다. 순간 내 발을 내려다봤다. 등산화를 신고도 미끄럽고 붏평하고, 발 아프다고 징징대는 내가 한심해졌다.
“와 갑자기 너무 부끄럽다” 나의 말에 친구가 답했다.
“저 아이들은 아직 어리잖아” 그런가? 역시 젊어서 그런 건가? 그들의 젊은 에너지가 내겐 위로가 되었다.
걸어올라갈수록 숨은 점점 차오르고 몸은 지쳐갔으며, 내 얼굴은 새빨갛다 못해 검붉은 색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반대편 저 위에서 전화통화를 하며 내려오는 여성이 보인다. 나는 숨도 쉬기 힘든데 큰 소리로 전화를 하며 날쌔게 내려온다.
진흙, 날카로운 돌, 거친 나무뿌리가 곳곳에 있는 그 땅을 밟으며 성큼성큼 내려오던 그녀는 맨발이다.
심지어 나보다 나이도 있어 보인다.
여기서 깨달았다. 평소 운동과 먼 삶을 살아온 내가 갑자기 산을 오르고 있으니 체력적으로 힘든 게 당연한데 나는 이유를 내 안에사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길, 옷, 신발, 젊음의 문제가 아니라 평소 늘 누워만 있던 내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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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도 한 모금 남지 않았다. 정상에서의 시원함과 뿌듯함은 잠시,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내려오는 길은 더욱 난제다. 이미 바닥난 체력, 들쭉날쭉한 계단들과 곳곳의 습지, 나를 향해 달려드는 날파리와 모기는 나의 인내심과 지구력 게이지를 팍팍 낮췄다.
게다가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이 무겁다 했더니 신발 밑창까지 찢어졌다. 처음엔 왼쪽, 다음엔 오른쪽. 걸어가면서 거짓말처럼 내 등산화의 밑창을 다 떼어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바닥이 깊게 패인 한쪽 발에 습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다리가 한층 더 무거워진 그 때 친구가 내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힘내~ 조금만 더 가면 끝이야!”
"거짓말 하지마 이시키야. 너 아까부터 조금만 더 가면 끝이라고 했잖아"
아니야 이번엔 진짜 네가 틀렸어. 전혀 힘이 나지 않아.
정말 힘들어서 다리를 질질 끌며 걷고 있는 누군가를 본다면 나는 “힘내~”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입 밖으로 내는 순간 흩어지는 말보다, 힘들어 보이는 그 등을 단단히 받쳐주거나 손잡고 끌어주리라 결심했다. 그것도 어렵다면 밥이라도 사먹이리라.
예전 드라마 “내이름은 김삼순”에서 주인공이 한라산을 등반하며 많은 것을 깨달았듯, 나 역시 깨달은게 있다. 겨우 한 시간 반 동안 겪은 나만의 작은 사투, 198m의 정도의 뒷동산을 오르면서 나는 마음 속 수많은 나와, 나약해지려는 자신과 싸워댔다. 이 전투들은 내 육체는 피곤에 찌들어 이곳 저곳 뻐근했지만 내 안의 무언가는 혈투를 벌인 듯 맑게 개인 느낌이었다.
친구가 묻는다. "그래서, 다음주도 등산 할거야?"
"아니. 나 이번에 깨달은게 아주 많아. 자꾸 산 다니다가 에베레스트라도 올라가게 되면 득도할까 무서우니 당분간 등산은 아주 멀리 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난 지금부터 동네 한바퀴 한 걸음부터 내딛어 체력을 비축해야겠다. 언젠가 누구의 등을 밀거나, 손잡고 끌어줄 날이 올 수 있으니. 밥을 사주게 될 수 도 있으니 잔고도 비축해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