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처 뒤 찾아온 인류애 박살
벌써 7번째. 나 이번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2시간 전, 매장 밖으로 내놓은 애니시다 화분이 텅 빈 채로 있는 걸 보니 노여움이 한 여름 태양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화분이 있던 주변에 마구잡이로 흩뿌려져 있는 흙을 보자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이 괘씸한 도둑을 잡아 말아?? 신고해 말아? 하자니 너무 쪼잔하고, 하지 않고 또 넘어가자니 내가 호구가 되는 것 같았다. 이미 7번이나 당했기 때문에 호구라 불려도 할 말 없지만 이번엔 너무 억울하고 속상하다. 고민하고 고민하다 다시 매장 앞으로 나갔다.
이번에 도둑맞은 화분은 대략 4만 원. 이거 하나 찾자고 공권력을 동원할 일인가? 피해가 하찮은데 경찰이 과연 도둑을 잡아줄까? 하지만 7번째 인걸? 이참에 도둑을 잡아서 8번째를 방지하자.
좋아, 대신 경찰의 일을 덜어주기 위해 내가 어느 정도 수사를 한 뒤 신고하는 게 좋겠어.
신고하기로 결론 낸 나는 바쁘게 움직였다. 한때 내가 열광했던 TV 시리즈 “CSI 마이애미”의 반장 ‘호라시오’처럼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흥미진진한 탐정 놀이에 내 몸의 도파민이 돌기 시작했다.
가게 앞 CCTV 전문점 사장님의 도움을 받아 골목 안까지 볼 수 있는 영상 파일을 확보했다. 해상도 낮은 화질이지만 도둑의 모습이 보였다. 모자와 마스크를 쓴 도둑은 우리 매장 옆 화단을 살펴보며 내가 장식해 놓은 장식물들을 들었다 놓았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리고 그 장식물을 땅바닥에 사정없이 내팽개쳤다. 이 부분에서 결심했다. “너 잡혀도 나 절대 합의하지 않을 거다!!합의는 없어!!!!!!”
장식물을 던져 산산조각 낸 도둑은 곧 매장 앞에 놓여있는 애니시다를 발견한 듯 했다.
화분 앞에 도착한 도둑은 우악스레 애니시다 끄덩이를 잡고 확 뽑아더니 매장의 흰 벽에 흙을 팍팍 털어낸 후 뽑아낸 화분을 잡고 그 앞 골목길로 건너가 자취를 감추었다.
‘아, 이래서 지금 매장 앞과 벽이 흙투성이구나’ 어이가 없었다.
나 같음 남의 것 손댄 것 만으로도 심장이 쿵쾅댈 것 같은데 이 도둑은 모든 과정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해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내 반드시 널 잡을 것이야.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확보한 여러 개의 CCTV 증거들과 분실한 화분 사진들 몇 개를 준비하고 112를 힘차게 눌렀다. 떨린다. 떨려. 몇 분 전 활활 타오르던 분노와 달리 ‘경찰’이라는 단어가 주는 중압감 때문인지 정의의 사도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나는 매장에 도착한 경찰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종이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피해 금액이 얼마라고요?”
“아…. 그게요..음... 사…. 사…. 사…. 만원인데요.. 이게…. 7번째…. 라서요....”
타오르는 나의 정의감과 달리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눈치 챈 경찰이 이보다 더 적은 금액으로 신고하는 경우도 많다며 공감해주었다. 그 순간의 그 말 한마디가 천군만마를 얻은 듯 아주 든든하게 느껴졌다. 역시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늦은 밤 가족들과 외식 후 귀가 하는 길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기 경찰서인데요. 꽃 도둑 잡았습니다. 그런데….”경찰은 내게 범인에 대해 설명했다.
꽃 도둑은 매장 부근에 사는 68세 정도의 여자분으로 몹시 어려운 형편이라고 했다.
인두암 4기로 병원 진료를 받고 조사를 위해 밤늦게 경찰서에 왔는데, 말을 하기도 어려워 그녀의 친오빠가 함께 와 진술을 했다고. 암 치료를 하는 와중 스트레스가 커 화분을 훔친 거라며 꽃도둑의 오빠와 함께 와서 사과할 거라고 했다.
딜레마에 빠졌다. 꽃도둑에 대한 사정을 듣는 순간 신고 직전의 마음속 분노는 새하얗게 연소하고 자기 반성이 시작되었다. 아, 나는 얼마나 속 좁은 인간인가. 이 화분이 암 4기의 환자를 경찰서에 드나들게 할 정도로 귀한 화분이었나. 4만 원을 돌려받기 위해 신고를 한 것인가? 여러 번 반복되던 분실에 그만 참지 못하고 신고를 한 내 자신이, 철없이 절도범을 혼내겠다고 도파민을 뿜어대며 형사 놀이를 한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삐걱삐걱 허름한 자전거를 타고 오래된 듯 손 때 탄 야구모자를 쓴 남자분이 매장에 들어왔다. 이른 봄날이지만 차가운 바람을 맞아 콧물 자국이 남아있는 모습으로.
꽃 도둑의 오빠라고 본인을 설명하셨다. 30년은 족히 어린 내게 머리를 조아리고 동생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선처를 부탁한다며 허리 굽혀 사과했다. 화분을 가져갈 땐 당당하고 힘차게 가져가던 사람이 사과하는 자리엔 왜 오빠를 보낸 건지. 그보다 이 분은 또 무슨 죄인가.
그 오빠분은 급히 주머니를 뒤적여 4만 원을 꺼내며 내게 건넸다.
“이걸로 충분하지 않겠지만 변상과 사과의 의미니 받아주세요”
잠시 꼬깃꼬깃한 그것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두 손 모아 4만 원을 받아 들었다.
“저 이거 받을게요. 저 사과 받았고, 배상도 받았어요. 일부러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매장 안쪽 사무실로 들어가 언젠가 쓰려고 아껴두었던 실크 돈봉투를 가져왔다.
받은 4만 원을 도로 조심스레 봉투 안에 넣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
“이건 제가 드리는 위로에요. 동생분이랑 따뜻한 소고기국밥 사드세요. 거절하지 마세요. 저~ 손 부끄러워요.”
그 후 경찰이 다시 다녀갔고, 나는 선처 관련 서류에 사인도 했다. 마음이 한층 편했다.
내겐 마음의 상처와 손해만 남았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몇 달 뒤, 옆 가게에서 화분이 또 도난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설마…. 아니겠지? 그분이 아닐 거야.
웬걸…. 잡고 보니 우리 집 화분을 가져갔던 그 도둑이었다.
이쯤 되니 내 인류애에 생채기가 난다. 내 알량했던 선한 마음이 냉소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누가 누굴 봐줘.
약자라고 무조건 선한 자는 아닌데. 내 어설픈 동정심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든 건가 싶었다.
꽃 도둑에게 한 마디 전하고 싶다.
아오~~다음에 또 걸리면…. 진짜 진짜 선처는 없어. 나 완전 냉정한 사람이야. 진짜 결코 절대 봐주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