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던 나는 빨리 씻는 게 습관이었다. 샤워기는 10대인데 한참 꾸밀 나이의 소녀 50명이 함께 사니 아침저녁으로 얼마나 샤워실이 붐볐는지 모른다. 기다리는 사람도 많거니와 얼른 씻고 공부할 욕심에 손이 빨라졌고, 시간이 아까워서 바디로션도 안 바르고 살았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학교생활과 알바로 늘 바빠서 씻는 건 그저 후딱 해치워야 하는 일일 뿐이었다.
씻는 것뿐만 아니라 사실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도 나에겐 '빨리' 하는 게 중요했다. 되도록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돈이든 지식이든지 말이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남편이 샤워하는 걸 보고 그야말로 '문화충격'을 받았다. 목욕을 좋아하는 남편은 독일의 신혼집에는 욕조가 없었기에 차선책으로 15분에서 20분 정도 느긋하게 샤워를 했다. 내 생각엔 암만 봐도 물 귀한 나라에서 물 낭비, 시간이 금인 유학생으로서 시간낭비로 보여서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습관 중 하나였다.
씻는 시간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남편과의 속도 차이는 더러 싸움의 원인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서로 맞춰가며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와의 속도 차이는 그야말로 멘털붕괴를 불러왔다. 육아는 '빨리빨리'가 전혀 통하지 않는 세계였다. 아이는 빨리 재우고 싶어도 그게 안 되고, 빨리 먹이고 싶지만 그게 안 됐다. 그저 아이의 속도에 맞춰 기다려야 했다.
또한 육아는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었다. 나중에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내 머리에 남는 지식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일도 아니었다. 애엄마가 애 키우는 것은 그저 당연한 일이니까.
그런데 그 육아의 시간 동안 '빨리빨리', 항상 최고 속도로 살던 내가 '느리게' 혹은 '멈춤'에 서서히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1시간 동안 아이가 잠드는 것을 기다리고, 초속 5센티미터의 걸음으로 따라오는 아이를 기다리며 속에서 천불이 나고 '빨리', '얼른'이라는 단어를 내뱉지 않으려고 이를 악 물었다. 안 자고 놀고 싶은 아이에게 빨리 자라는 말은 별 소용이 없었다. 멈춰 서서 고양이를 보고 싶은 아이에게 얼른 가자고 재촉해봤자 피차 스트레스일 뿐이었다.
그렇게 6년을 살다 보니 이 속도에 많이 적응을 했다. 이제는 그 안에서 아이들만이 줄 수 있는 느림의 행복을 제법 즐길 줄 알게 됐다. 아이들은 내게 '느리게 살아도 괜찮아, 별 일 안 나!'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돈이 되고 지식이 되는 일이 아니라도 하고 싶은 일, 지금 나에겐 있어선 '육아'라는 일을 먼저 해도 괜찮다는 걸 알려주었다.
셋째를 낳은 지 이제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큰 아이 둘은 한여름에 낳았는데 셋째는 초겨울에 낳아서 그런지 따듯한 물에 오래오래 샤워를 하는 게 좋아졌다. 남편이 샤워할 때마다 느끼는 행복이 어떤 건지 이제 알겠다. 그가 나보다 마음이 넉넉한 것은 하루의 끝에 그토록 기분 좋은 물장난으로 고단함을 씻어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나는 이전에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무수히 경험한다. 그것은 언제나 깨어짐인 동시에 깨어남이었다. 삶의 속도에 대한 나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낳기 전 삶의 속도가 '빠르게'라는 뜻의 '비바체(Vivace)'라면 현재 삶의 속도는 아주 느리고 침착하게 연주할 것을 의미하는 '아다지오(Adagio)'다. 빠르게 연주할 부분을 빠르게, 느리게 연주할 부분을 느리게 연주하는 게 맞듯이 삶의 속도 역시 지금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맞출 때 일상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