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10년차, 무수한 집안일 중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집안일이 생겼다. 바로 정리와 청소이다. 정리의 한자어를 살펴보면 '가지러한 정(整), 다스릴 리(理)'로 가지런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정리라는 행위는 원래 좋아했지만, 6년 동안 세 아이 임신과 모유수유를 반복하며 살림보다 육아에 치중했기에 물건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배치할 여유가 없었다. 안 쓰는 물건들은 그냥 어딘가 처박기 일쑤였고 그러다보니 서랍만 열어도 한숨이 나왔다.
지금도 치우는 자는 하나고 어지르는 자는 셋으로 일 대 삼의 대결이다 보니 오며가며 하나라도 줍고 서랍에 갖다 넣지 않으면 집이 '집구석'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어질러진 집을 무시하는 나의 능력은 매우 뛰어난 편이지만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을 만큼 어질러졌을 땐 내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린 것 같아 무기력해진다. 정리시간을 정해놓고 아이들과 함께 정리하니 조금 낫지만 아이들의 정리실력은 아직 종류별로 정확하게 분류해서 넣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해서 정리라고 해봤자 바구니에 마구 담는 식이니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러다 반년 전부터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면서 필요 없는 물건과 잘 안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많이 처분했더니 정리가 조금 수월해졌다. 예전에는 어질러진 거실을 치우려면 '내가 놀지도 않았는데 내가 왜 이 장난감을 치워야 돼' 같은 원시적인 생각을 하며 짜증이 먼저 났는데 이제는 '딱 10분만' 치우자며 나를 다독인다. 자꾸 하다보니 내 움직임이 즉각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정리의 매력도 깨달았다. 내 통제를 벗어났던 삶이 다시 내 손 안에 있는 듯 한 안정감과 뿌듯함이 느껴져서 정리는 내가 가장 즐겨하는 집안일이 됐다.
두 번째 내가 좋아하는 집안일은 청소(더럽거나 어지러운 것을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함)다. 첫 애 하나만 키울 때도 매트를 다 들어내고 환기를 하며 청소기를 돌리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나에게 청소는 날씨와 컨디션이 좋은 어느 날, 온 집안의 모든 먼지를 다 털어내고 청소기로 빨아들여서 깨끗하게 하는 고된 노동을 의미했다.
그러다 2년 전 어머님이 아이들에게 '어린이날 선물로 뭘 사줄까' 물으셨을 때 아이들이 할머니네 집에 있는 '미니빗자루'를 사달랬다. 아들, 딸에게 각각 하늘색, 분홍색 플라스틱 빗자루와 쓰레받기 세트를 사주셨는데 그걸로 식탁 밑에 아이들이 흘린 부스러기를 쓸어보니 그 용도에 딱이었다. 그거 치우자고 유선청소기 돌리기도 귀찮았는데 빗자루로 쓸어내니 간편하고 자주 치울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현관바닥도 자주 쓸지 않았는데 역시 빗자루가 들어와서 하늘색 빗자루세트를 현관용으로 쓰기로 하고 자주 쓸어내니 입구가 훨씬 훤해보였다. 둘째 때는 현관에 나가지 못하게 안전문을 해두었는데 아이들이 크면서 하도 매달리고 넘어 다녀서 다 부서진 지라 셋째 때는 아예 설치를 안 했다. 그래서 마음껏 맨발로 현관을 오가는데 조금만 게을리 하면 거실에서 운동장을 방불케 하는 흙더미를 쓸어내게 되기 때문에 자주 쓸려고 노력한다.
미니빗자루로 식탁 밑이나 아이들이 잘라놓은 색종이 등 어질러진 부분만 쓸다가 점점 비로 쓸어내는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정리처럼 비가 지나간 자리가 바로 깨끗해지니 뿌듯했고, 바닥을 쓰다듬는 그 느낌이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었다. 비가 바닥에 닿는 느낌은 얼음판을 유유히 떠다니던 김연아가 떠오를 정도로 부드러웠다. 내 생애 첫 연장의 발견이었다.
얼마 전 김훈 작가의 산문 '눈을 치우며'를 읽었는데 나의 경험과 절묘하게 맞아들어가는 연장에 대한 선생님의 통찰에 쑥 빠져들어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선생님은 '밀판과 삽을 들고 눈을 치울 때 나는 연장을 쓰는 작업의 행복을 느낀다. 연장은 몸의 연장(延長)이다'라고 쓰셨다. '연장의 의미를 알게 되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것이다. 눈 치우기는 노인의 노동이다. 나는 삽을 쓰고 싶어서 눈을 기다린다.'고도 쓰여 있는데 나도 비로 쓰는 느낌이 좋아서 아이들이 부스러기를 흘려도 이제는 짜증이 안 난다.
청소기로는 코드를 꼽고 전기선에 연결되어야 청소를 할 수 있지만, 빗자루나 걸레는 그저 집어서 바닥을 쓸어내면 된다. 청소의 주체가 청소기가 아닌 나이며 나의 노동력이다. 특정도구에 의지하거나 전기의 도움 없이 내 몸과 빗이든 걸레만 있으면 바로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비질의 장점이다. 또한 청소기가 내는 엄청난 소음은 청소 자체를 부산한 작업으로 만들지만 사부작사부작 조용히 쓸어내는 움직임은 그 과정 자체가 깨끗함으로 다가온다.
정리와 청소를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이 늘 깨끗한 건 아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 깨끗하고, 5일은 더럽고, 하루는 이삿집에 가까운 상태다. 여전히 청소에 시동을 걸기가 어려울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살림에 비하면 시작하기 위한 정신적 에너지가 덜 들고, 더러워졌다가 다시 회복되기가 가장 쉽다. 청소의 동력으로는 손님맞이가 가장 좋은데, 심지어 손님맞이 전날에는 '드디어 내일은 깨끗해 질 수 있겠구나'라는 안도감마저 든다.
얼마 전 첫째 친구가 집에 놀러왔다. 아이 친구는 2급 손님이지만 아직 안 친한 아이 친구 엄마는 1급 손님으로 나는 최상의 청소실력을 발휘한다. 다 같이 놀이터에서 나가 노는데 아이 친구 엄마가 “영한이가 예준이네 오면 물건이 없어서 속이 탁 트여서 좋대요. 거실에서 막 뛰어다닐 수 있고.”라고 칭찬해주셨다. 그 집에 비해서 거실에 내놓은 장난감이나 물건이 적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긴 하지만 집이 깨끗해서 칭찬 받은 건 내 생애 처음이라 자기 전에도 생각나 입고리가 올라갈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나는 집에 대한 정반대의 칭찬을 받았다. 콘센트가 고장 나서 전기 기사님이 오셨는데 오전에 오랜만에 미세먼지가 없어서 나가 실컷 나가논 지라 거실이 옷과 장난감과 병원놀이에 수시로 쓰는 애기이불로 난장판이었다. 두꺼비집을 보시면서 기사님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셨다.
“제가 이런 말 드리긴 죄송스럽지만 애들이 참 행복해 보여요.”
“네?” 나는 '죄송스럽지만'과 '행복'이라는 단어가 만들어낸 부조화에 당황해서 다음 내용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저희 집사람은 너무 깨끗해서 애들이 집에서 청소 안 한다고 엄청 혼나고 주눅이 들어요.”
“아... 저도 치우다 치우다 못 치워서 그런 거예요.”하며 얼버무렸지만 처음 받아보는, 더러움에 대한 칭찬에 기분이 좋을 듯 말 듯 했다. 여하튼 애들이 행복해 보인다고 하니 그거 하나만은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를 인격의 문제로, 사람은 이 정도는 깨끗해야 사람답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지만 나는 청소를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카페라떼를 더 좋아하는지 믹스커피를 좋아하는 지처럼. 다만 더 중요한 건, 그 안에서 지내는 사람의 마음이다. 남들이 보기에 충분히 깨끗한 상태에서도 더 높은 깨끗함에 집착하고, 남들에게도 그 깨끗함을 닦달하느라 수고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누가 봐도 더러운 상태에서도 물건을 잘 찾고 편안함을 느낀다면 그 정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부유한지 가난한지가 행복의 절대 척도가 되지 않듯이 깨끗함도 그렇다. 나는 카페에서 마시는 카페라떼도 좋아하고, 믹스커피도 좋다. 그리고 집이 깨끗할 때나, 더러울 때나 나는 편안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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