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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사람소소 Nov 04. 2020

1. 전자책 예찬




셋째를 임신한 걸 알고 내가 큰맘 먹고 구입한 건, 식기세척기도 아니고 건조기도 아니었다. 바로 전자책리더기였다. 나에게 ‘책 읽기’는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구절에 밑줄을 긋거나 포스트잇으로 표시하고, 그 문장들을 컴퓨터로 타이핑해서 파일로 저장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과정이다. 하지만 셋째가 태어나면 당분간 그냥 읽기는 가능하겠지만, 타이핑할 시간을 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열심히 검색한 결과, 전자책리더기로는 내가 표시한 부분을 공유기능을 통해 타이핑하지 않고 텍스트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기계치지만 용기 내어 전자책리더기를 구입했다.  




전자책이용자들의 인터넷카페에서 입문용으로 많이 추천하는 기기를 구입했다. 모르고 구입했지만 내가 구입한 인터넷서점에서는 전자기기 구매자에게 매달 이런저런 쿠폰을 많이 발행해준다. 덕분에 일,이천원만 보태도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살 수 있다. 전자책이긴 하지만, 내가 밑줄 그은 그대로 책을 가지고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집안 사정이 넉넉하진 못 했기에 나에게 책은 당연히, 항상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것이었다. 빌려온 책을 읽을 때는 작은 포스트잇을 책앞표지 뒤에 끼워두었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오면 그 구절 옆에 붙여두었다. 그리고 반납하기 전에 그 구절들을 컴퓨터로 필사했다. 이렇게 책을 읽을 때의 문제점은 책 내용이 좋을수록, 기억해야할 내용이나 맘에 드는 표현이 많을수록 필사해야할 내용이 많아진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구입한 전자책을 읽을 때는 원하는 부분에 밑줄이나 하이라이트를 마음껏 할 수 있고 또 밑줄 그은 부분을 바꿀 수도 있으니 편했다. 또한 밑줄 그은 내용은 독서노트에서 한 번에 볼 수 있는데 다 읽고 독서노트만 쫙 읽으면 뷔페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만 골라먹은 것 마냥 충만했다. 표시한 부분은 공유기능을 통해 카톡이나 메모 프로그램로 공유할 수가 있다. 다만 전체를 한 번에 할 수가 없고, 밑줄 그은 부분별로 공유해야 하는 것이 조금 불편하다. 그래도 직접 오랜 시간 타이핑하는 시간이 확 줄어들었다.   




전자책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한 건 셋째를 출산하고 나서다. 100일 전에는 두, 세 시간 간격으로 수유를 하는데 수유의자에 앉아 수유쿠션을 하고 남편이 악보 볼 때 사용하는 보면대에 전자책을 올려놓고 읽었다. 낮에는 큰 아이들이 있지만 책 볼 준비는 하고 수유를 시작한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놀다가도 내가 전자책 읽는 걸 보면 자기 책을 읽어달라며 들고 온다. 보면대 위의 내 전자책을 밀어내고 자기들 책을 펼쳐 놨다.  




아이들이 잠든 밤에는 스탠드를 켜놓고 전자책을 읽으며 수유를 했다. 밤중 수유를 많이 했던 백일 전에 오히려 책을 더 많이 읽었다. 아이는 젖을 다 먹고 잠들었는데 나 혼자 책에 빠져서 삼, 사십분이 지나도록 책을 읽은 적도 있다. 초겨울에 출산해서 자주 나가지 못했던 내게 책은 내가 산책할 유일한 세상이었다.  




전자책의 또 다른 장점은 조명이 켜진다는 점이다. 자기 전에 작은 조명만 켜고 책 읽다 잠드는 걸 참 좋아했는데, 아이들이 태어난 뒤로는 빛에 예민하니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전자책이 있으니 잘 준비 다 하고 엎드려서 이불을 어깨까지 덮고 전자책 조명을 약하게 켠 뒤 책을 읽다 잘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 호사를 다시 되찾다니! 어두운 데서 책 읽으면 속된 말로 눈 버리는 거 알지만 그 작은 행복을 포기할 수가 없다. 자기 전 독서는 어수선했던 낮의 마음을 정돈해주고 잠이 잘 오게 다독이는 수면제와 같다.   









난 세 아이의 엄마지만 육아서는 별로 읽지 않는다. 내가 이미 좋은 엄마라고 착각해서 육아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온 신경을 쏟았는데 책까지 육아서를 보면 정말 산소가 부족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갑갑하다.   




엄마가 되고 난 뒤로는 사실 육아서가 아니라 어떤 소설, 시, 웹툰, 신문기사를 읽어도 엄마의 눈으로 읽게 됐다. 그리고 책 속에서 무수히 좋은 부모의 본을 만난다.  




예를 들어 얼마 전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속 주인공 두 남매는 엄마가 없다. 하지만 아이들의 아빠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길에서나 집에서나 한결 같은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인격적인 사람이다. 덕분에 아이들은 구김살 없이 밝게 자라난다. 책을 본 뒤 놀이터에서는 말씨가 다정했다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옷부터 벗으라며 소리치는 내 모습을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른다.  




심윤경 작가의 장편소설 ‘설이'는 소설판 'SKY캐슬'이라는 광고 문구에 끌려 읽게 됐다. 설이를 키우는 이모는 정식입양되기 전 잠시만 맡아 키우는 위탁모다. 고아인 설이는 여러 번 입양됐지만 다시 파양당하며 오랫동안 이모 품에서 자란다. 설이가 부모에게 버려진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노로 폭발할 때마다 이모는 숨도 못 쉬도록 꼭 껴안아 아이를 진정시킨다.  




나는 위기상황에서 육아서의 딱딱한 조언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육아 팁이 더 잘 떠오른다. 아마 주인공의 모습이 머릿속에 이미지로 각인되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가 제 뜻대로 안 해준다고 소리 지르며 드러누울 때, 용케도 설이이모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모처럼 아이를 그저 꼭 껴안아주었다. 어떤 때는 말 안 듣는다고 혼내는 것보다, 반복해서 이유를 설명하는 것보다 더 빨리 아이가 마음을 추스른다.   




그리고 인터넷서점에서는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을 전자책으로 사 모으고 있다. 그 중 자전소설인 '그 산이 어디 갔을까'에서 작가는 한국전쟁 중 새언니와 둘째조카를 데리고 피난을 떠난다. 곡식과 천기저귀까지 짊어지고서. 그 와중에 아이가 고열을 앓는데 아이가 죽을까봐 읽으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흔히들 육아가 전쟁 같다 하지만 그 전쟁과 감히 비할 바도 못 된다는 걸 새삼 느낀다. 내 아이들과 따듯한 집에서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가끔 너무 재밌는 소설을 만나면 살림도 육아도 모두 멈춰버린다. 조조 모예스의 로맨스소설 '미 비포 유'나 평생 야생동물을 연구한 생태학자 델리아 오언스가 일흔 무렵 쓴 첫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그랬다. 낮에도 애들 밥만 주고 틈만 나면 책을 읽다가, 애들 다 잔 뒤 새벽 2,3시까지 정주행해버렸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이 일어나서 깨우면 너무너무 피곤하지만 책 한권을 읽었다는 포만감 덕분에 힘이 나서 번쩍 일어난다.  




사춘기보다 격정적이었던 셋째 돌까지의 일 년을 전자책이 있어서 수월하게 지나올 수 있었다. 아이들 책 읽기는 잊을지언정 내 책 읽기는 건너뛸 수 없었다. 내가 읽은 책들이 나만의 육아관이 되고, 세계관이 되어 견고한 벽돌집처럼 그 안의 나와 내 아이들을 지켜줌을 알기 때문이다.    

내 감정과 생각이 사람들 말에 흔들리지 않게,

내 육신이 피곤에 굴복하지 않게.

그래서 오늘도 집을 짓듯, 책을 읽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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