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눈을 바라보면 그 눈빛을 계속 보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 아이가 세상에 용기 있게 살아가도록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다는 마음들이 하루에도 몇 차례식 들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내가 그에게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낀다는 그 말이 딱 맞았다. 나는 아이에게 늘 부족한 엄마였다.
어떻게 하면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아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날들이 많아졌다. 아이의 놀이하는 행동, 잠자는 모습, 먹는 모습, 가끔씩 하는 말들이 모두 내 눈과 마음에 꼭 와서 박혔다.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을 보고 있노라면 내 모습과 오버랩되는 것은 어쩐 일일까?
`내 뱃속에서 나왔는데, 네가 누굴 닮았으랴.`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가 왜 그럴까? 내가 더 나은 엄마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하다 보니 결론은 `나`였다.
내가 나를 잘 모르기에 나에게 맞는 육아 방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헤매고만 있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왜 이런 마음이 들까?`, `나는 왜 이 부분이 두려운 것일까?`, `아이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으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고민들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보육 공부를 하며 배웠던 심리학자의 이론들이 떠올랐던 이유가 컸을 것이다.
고민들과 함께 내가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은 나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편안해하고 불편한 것은 무엇인지를.
그동안은 부모님에 의해, 주변 사람들에 의해 나를 정의해 왔다면, 아이를 출산한 후부터는 내가 나를 정의해야만 했다. 내 아이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한 필수 요소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8년 동안 아이를 키우며 나는 나를 키우기도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전보다 더 명확히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을 만들기 위해 아이와 함께 노력하며 지금의 시간들을 만들어 왔으니까.
육아는 나에게 너 자신에 대해서 더 잘 알라고 주어진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처럼.
육아는 그 어느 때도 겪어보지 못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탈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나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 중 최고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