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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마중 윤정란 Nov 19. 2024

너와 나의 의사소통

우리의 의사소통은 말이 다가 아니다.

`아이 키우기가 가장 힘든 이유가 무엇일까?

아이가 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일까? 

그럼, 내 말대로만 따라한다면 아이 키우기가 쉬울까?`

내 입에서 아이에게 잔소리가 나옴과 동시에 먼지처럼 공중으로 사라져 버리는 말, 눈앞에서 말을 지질히도 듣지 않는 아이를 보며 생각에 잠겨본다. 

`아이가 내 말대로만 행동한다면 정말 괜찮을까?`  


    

행동주의학파인 왓슨의 말이 떠오른다.

`나에게 아기 12명과 적당히 잘 훈련된 보모를 주면, 아무리 건강하고 지능이 낮더라도 내가 선택한 어떤 전문가로든 그 아이를 키워내겠다.`

예전에 수업을 들으며 이 말을 들었을 때도 몸서리가 쳐졌는데, 이 말이 다시 떠오르자 나도 몰게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아니지, 아니야. 아이를 이렇게 물건 취급 하는 건 싫어. 어떻게 아이를 내 마음대로 키울 수 있을까? 이건 너무 오만이 아닐까?`

행동주의 학파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행동주의적인 기법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나는 좀 더 인본주의에 가까운 것 같다.   


  

`왜 내 말을 듣지 않는 걸까?`

이런 생각을 오랜 시간 지속해 오다가 아이의 말 한마디가 나의 뒤통수를 때렸다.

``엄마, 엄마한테서 선생님 냄새가 나.``

6세가 된 아이 입에서 이건 무슨 소리인가. 나는 화장품도 무향을 주로 쓰는데. 이 말뜻을 혼자서 머릿속에서 굴려본다. 

그 당시 보육교사였던 나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도 어떻게 하면 내 말을 잘 듣게 할까 고민이었다. 아이들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내 통제 하에서 아이들이 생활하기를 바랐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어 했던 참으로 욕심 많은 교사였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에게 확실할 범위, 교실의 규칙을 많이 강요했다. 이런 모습이 나도 모르게 몸에 배어 있었나보다. 아이는 그것을 느낀 것이다. 엄마에게서 느껴지는 느낌이 어린이집 선생님과 비슷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이에게 많이 미안하다. 내 아이에게만은 나는 교사가 아닌 엄마의 역할을 했어야했는데, 초보 엄마인 나는 이 부분을 혼동했던 것이다. 오로지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일념 하에 어쩌면 행동주의적 입장에서 말이다.

`어린 줄로만 알았는데, 나의 말이 아니라 나에게서 느껴지는 느낌을 너는 다 느끼고 있었구나. 그것으로 나와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구나. 말로만 대화를 한다 생각했던 건 나의 큰 착각이구나.`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눈을 깜박이기 시작한다.

하루, 이틀을 넘어 일주일 넘게 지속이 된다. 2주, 3주가 지나도록 눈 깜박임이 멈추지 않는다. 병원에서는 직접적으로 말해주지는 않지만 직감으로 느껴진다. 

틱이다!

틱은 아이가 심리적으로 힘듦을 느낄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지금 너에게는 무엇이 힘들고 부족하다고 느끼는 걸까 고민을 하며 아이의 행동을 보기 시작한다. 그동안 우리 집의 하루 패턴을 복기해본다. 어린이집 평가인증으로 매일 밤12시가 되어야 들어왔던 나. 엄마 보겠다고 안자고 기다린 아이에게 숙제를 했는지부터 물어보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노는 거 좋아하는 아이가 학교에서 꾹 참고 앉아서 수업 듣는 것도 힘든데 숙제까지 하고, 엄마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었다고 내 나름 추측을 해 본다. 그렇게 속이 타들어가듯 5개월이란 시간이 흐르고 아이에게 찾아 온 방학과 함께 어린이집 평가인증도 끝났다. 간만에 학교 갈 생각 없이 편안하게 하루를 보내는 아이는 눈 깜박임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아... 너는 나에게 몸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구나. 힘들다는 표현을 말로 못하고 몸으로 하고 있었구나.` 생각과 함께 내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떨어진다. 나를 보고 해맑게 웃어 보이는 아이 모습이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어쩜 이렇게도 공부를 안 할 수 있을까? 학교 갔다 와서 던져진 가방이 그 다음날까지도 그 자리에 있다. 천하 태평한 고1 아이의 모습을 보면 속이 터진다.

`내일 시험인 아이가 맞나? 혹시 내가 학교 일정을 잘 못 알고 있나?`내 자신이 헷갈릴 정도다. 

``내일 무슨 과목 시험이야?``를 시작으로 너의 꿈이 무엇인지, 삶을 어떻게 살면 좋을지를 아이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은 `너! 공부 안 해!`이었지만, 아이 눈치 살피며 뱅뱅 돌려 말을 한다. 

``엄마, 지금 나한테 공부 하라고 하는 거잖아. 엄마가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학교 쌤들이 말하는 게 나한테는 더 잘 먹히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아이는 간파를 했다. 내 마음을. 이 자식 독심술이 있나? 눈치 못 채도록 뱅뱅 돌려 말했는데 어떻게 안 거냐며 마음속으로 적잖이 놀랬다. 

`너는 내 눈빛에서 내 마음을 벌써 읽었구나. 나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며 너에게 말을 했는데, 너는 내 눈빛을 보고 내 마음과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구나.`


     

아이를 키우며 알아간다. 우리가 하는 의사소통은 말이 다가 아님을.

나의 눈빛, 표정, 손짓, 움직임의 강도, 억양, 분위기로 오감을 열고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아이는 오감을 활짝 열고 부모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아무 말 없이 주방에 있는 나에게 "엄마, 화났어?"라고 아이가 물어본다면 그때부터 표정에 신경을 써야 한다. 아이는 내 표정으로 나의 상태를 살피기 때문이다. 이제 걷기 시작한 아이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아이가 찡얼거리거나 손을 빼려하면 우리는 알아채야 한다. 팔을 들고 있어서 아프다는 것을.

말로만 의사소통을 하려는 나에 비해, 자신의 온 몸을 열어 나와 의사소통하는 아이의 사랑이 어쩌면 더 큰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아이를 더 많이 사랑하는 방법은 아이처럼 나의 감각들을 모두 열어 아이가 보내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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