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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마중 윤정란 Dec 09. 2024

나에게 육아란 무엇인가?


 그동안은 살면서 의미를 크게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그저 주어진 대로,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큰 의미 없는 시간들이었지만 미래에는 더 좋아질 것이란 마음은 늘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 행복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으면서.

 그러던 나에게 큰 위기가 다가왔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고, 내가 과연 이 아이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잘 키울 수 있을까란 불안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고민은 시작되었다. 

`잘 키운다는 건 어떻게 키우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엄마로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가?`



 끊이지 않고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질문이 있으면 답이 있어야 하는데, 답이 없는 질문들만 말이다. 답을 찾기도 전에 더 많은 질문들이 쏟아져 나와 내 머릿속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내가 잘 생각하고 있는지, 내 결정이 올바른지 늘 고민하고 생각하고 수정하기를 반복하는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근원적인 질문인 `나에게 육아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육아는 아이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키워, 성인이 되어 사회에 잘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이라고 한다. 이 말이 참 모호하다. 독립적인 인격체는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키워야 하는 걸까? 아이가 사회에 잘 적응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외동이를 키우는 나에게 사회성은 늘 숙제 같았다. 외동이라고 자기만 알까봐, 무례하다는 말을 들을까봐, 고립될까봐.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학부모 상담을 갈 때면 늘 묻던 질문 중 하나였다. 

``우리 아이 또래 관계는 어떤가요?``

그만큼 아이의 사회성을 걱정했던 나에게 독립적인 인격체, 사회 적응이라는 단어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통해 이제야 육아에 대해 나의 정의가 내려졌다.

 독립적인 인격체란 아이마다 타고난 기질이다. 기질은 학문적으로 보통 3가지 나눈다. 순한 기질, 까다로운 기질, 느린 기질. 타고난 성향이 어디 이 3가지 기질 뿐이겠는가? 소리에 유독 민감한 아이도 있고, 손의 감각이 타고난 아이도 있다. 목소리가 큰 아이도 있고, 매우 활달한 아이도 있다. 어린이집에서 17년 동안 아이들을 수백 명을 만나보았지만, 똑같은 아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다. 조물주의 창조능력이 뛰어나시다는 생각이 든다. 똑같은 아이가 없다는 뜻은 저마다 가지고 태어난 장점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을 나는 매우 좋아한다. 8가지의 지능 중 사람마다 타고난 2~3가지의 지능이 있다고 하니까. 경험과 책을 통해 아이들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는 아이의 장점을 찾기 시작했다. 내 아이의 장점은 뭘까, 뭘 잘 할까? 아이가 타고난 장점을 잘 살려주어 그것으로 경제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독립적 인격체로 키운다는 의미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진 장점으로 돈을 벌고, 그것으로 사회에 기여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회에 잘 적응하고 산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로는 아이가 잘 못하는 점을 보고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기다려주고 버텨주는 힘이 생겼다. `언젠가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노력을 하겠지.` 라고.



 부모가 되면, 아이의 부족한 부분이 더 잘 보인다. 왜 하필 내가 가진 성향 중에서 싫은 것만 아이가 타고 난 건지, 남편의 안 좋은 것만 타고 난건지 싶은 마음에 아이의 장점이 가려진다. 장점이 한두 가지라면 장점은 10개도 넘으니까. 그렇지만 부모라면 다른 사람이 발견하지 못하는 아이의 장점을 발견하도록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가 자신의 장점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며 키워가려고 마음을 갖도록 부모는 뒤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때로는 아이를 있는 힘껏 밀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아이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손만 얹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SNS에서 읽었던 문구가 생각한다. 부모는 운전자가 아니라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라고. 운전은 아이가 해야 하고, 어떤 방해에도 그 운전대를 놓지 않고 아이 스스로의 힘으로 목적지까지 운전해 갈 수 있도록 조수석에서 지켜봐주는 사람이라고.

 우리는 부모가 되면 아이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앞에서 이끌어주지 않으면 아이가 도태되고 낙오자가 될 것 같은 불안감에 어떻게든 끌고 가려 하지만, 그건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삶이 아니기에 독립적인 인격체가 되는 것과는 반대되는 일이다. 태어나서 처음에서 앞에서 끌어주는 것이 맞지만, 아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남에 따라 점점 운전대를 아이의 손에 쥐어주어야 하는 것을 잊게 된다. 불안한 마음에. 그럴 때마다 아이의 그동안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면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아이는 자신의 삶에 진지하다는 것을, 내가 느끼고 있는 것보다 아이는 훨씬 더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를 믿어줄 때, 아이도 삶을 꾸려 갈 힘이 생기고, 아이에 대한 부모인 나의 마음에도 믿음이 더 굳건해진다는 것을 육아에 대한 나의 정의를 내리며 다시 깨닫게 된다.



 솔직히 나도 아직 나의 장점을 정확하게 모르겠다. 그런 내가 아이의 장점을 찾아 준다는 건 어찌 보면 어불성설일 수도 있으나 아이를 생각하다보니 나를 생각하게 되었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에 대한 고민까지 확장이 되면서 긍정적인 마음과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아이의 장점을 찾아주며 덕분에 나의 장점도 열심히 찾아가는 여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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