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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두 잔과 붉은 열매 하나

by 신선경






1층 | 맞춤 수제화


-유나 씨가 선물까지 줬는데 카페에서도 계산했어. 자기가 준 돈으로 밥값 낸 건데 기어코 사더라고. 내일 출근하면 자기가 맛있는 거 사줘. 남은 건 내가 잘 쓸게.


여자는 아이 옷이 든 쇼핑백을 흔들며 남편에게 생글거렸다.


-알았어. 맛있는 걸로 먹지 그랬어.

-응. 맛있었어. 오랜만에 과식했네. 자기는 밥 먹었어?

-응. 먹었지. 유나는 갔고?


두 여자가 만나는 동안 사장은 유나에게 연락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었다.


-남자친구 만난다고 택시 타고 갔어.

-무슨 남자친구?


남자는 구두 밑창에 본드를 가볍게 눌러 짜냈다.


-자기 봤다며? 가게도 왔었다던데!


건조한 남자의 얼굴이 본드처럼 굳어졌지만 여자는 더 흥분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엄- 청 잘생겼다며 키 크고! 아이, 내가 봐야 하는데. 같은 학교니까 자기한테도 후배잖아. 어땠어?

-사귀는 거 아니고 유나랑 그냥 동창 사이야.

-에이 왜 이래. 가게 와서 신발 산 거 보면 딱 몰라? 그리고 유나 씨도 마음에 든대! 좋을 때다 그치? 아줌마인 내가 더 설레네.

-애가 좀 가볍더라고. 유나 같은 성격은 어른스러운 남자 만나야 해. 동갑은 절대 아니야.

-우리도 동갑인데 뭐. 그리고 자기는 잠깐 보고 사람 어떻게 알아. 성격도 밝은가 보네? 잘되면 좋겠다! 느낌이... 오늘부터 사귈 것 같은데!!

-그만 들어가. 오늘은 안 바쁠 것 같아.

-그래도 돼? 나 그럼 백화점 좀 들리게.


여자가 나간 후 가게는 조용했다. 남자는 떨어진 밑창이 벌어지지 않도록 힘껏 눌렀다. 그러다 엄지손가락에서 딱 소리가 났다. 그 이후로 손님이 오고 갔지만 남자의 머릿속에는 웃고 있는 남녀가 넘실거렸다.

22°인 에어컨을 18°로 내리고 유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 못 먹는 음식 있어?


유나는 동민이 운전하는 차로 저녁을 먹으러 이동 중이었다.

좁은 차 안에선 감정의 무게가 잘 느껴진다. 손이 멋대로 움직이려 해서 동민은 핸들을 꽉 쥐었다.


-음. 홍어? 돼지국밥. 기름진 거 외엔 특별히 가리는 거 없어.

-나도 홍어는 별로.


그녀와 더 멀리 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손에 쥐가 났을 거라 다행이었다.

도착한 곳은 친한 지인의 부모님 가게였다. 동민은 유나를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었고 그녀에게도 가까운 지인들을 보여줄 계획이었다.


아삭한 채소에 올리브오일이 뿌려진 샐러드.

향긋한 도라지무침과 양념 올린 가지찜.

노릇하게 구워진 고등어.

유나가 특히 좋아하는 무나물까지.

화려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조미료 맛이 안 나는 건강한 한 끼였다.

식사하는 내내 밝은 표정의 유나를 보며 동민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게 밖으로 나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8월은 완연한 여름이었다.


-확실히 난 한식이 맞나 봐. 몸이 좋아하는 게 느껴져. 고마워 동민아. 하나같이 다 맛있었어. 일부러 더 신경 써주신 것 같아서 괜히 죄송하네.

-아니야. 원래도 그러시니 부담 안 가져도 돼. 간이 심심해서 안 좋아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앞으로 자주 오자!

-응!

-근처에 와인바 괜찮은 곳 있는데 괜찮지?

-차 가지고 왔잖아. 대리할 거야?

-아니, 내일 새벽 촬영이 있어서. 단골들한테는 커피도 판매하시거든. 원두 향이 좋더라고.

-그럼 나도 커피 마실까?

-응, 그래도 되지. 칵테일이 괜찮아서 데려가고 싶었던 거니까 가볍게 마셔도 좋고.


한적한 곳에 작은 간판이 세워진 가게였다. 몇 개의 계단을 내려가니 음악 소리가 들렸다. 한눈에 들어오는 규모였지만 테이블도 여럿 있었고 바텐더는 3명쯤 보였다. 커피 두 잔과 직원의 추천을 받아 칵테일도 하나 주문했다.


-손 좀 씻고 올게. 생선을 너무 맛있게 먹었나 봐.

-응. 저 기둥 안쪽으로 있어.


동민은 칵테일 한 잔쯤 충분히 마실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혹시라도 술기운을 빌린 용기로 비치면 안 됐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하나인데 잔이 세 개 올려졌다. 검은 물이 둘, 존재감이 완벽한 하나. 복숭아, 레몬, 크랜베리가 섞여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피치크러시였다. 마티니 잔에 담긴 붉은빛은 노을의 황홀함을 풍겼다. 그 자태 앞에선 누구나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영롱함에 빠진 동민을 깨운 건 옆에 올려진 네모 따위였다. 휴대폰 검은 화면이 잠시 동안 밝아졌다.


-어머 색 좀 봐.


그녀는 자신 있어진 손으로 완벽을 들었다. 하얀 얼굴이 물들어 보이는 1cm 앞까지 가져갔다.


-음. 복숭아 향 좋다.

-뭐 온 것 같던데?


동민은 그녀의 휴대폰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 잠깐만.


[ 보고 싶다... 나 혼자 있어. 가게로 와~ 집에 바래다줄게. 올 때까지 기다린다. ]


-집에 가야 하는데 내가 너무 붙잡고 있는 건가?

-아직 8시인데! 괜찮아.


이제 울리지 않을 휴대폰을 가방 안에 툭 넣었다.


-부모님께 연락이 왔나 했지.

-아니야. 근데 이거 20도? 넋 놓고 마시면 확 취하겠어.

독주가 아니어도 유나 혼자만 마시려니 약간 긴장됐다. 어두운 장소와 그의 옆에서 자신도 모르게 느슨해져 버렸다. 달콤함을 온몸으로 퍼트리고 싶었지만 입안을 적실 정도만 입을 열었다.

커피잔에 얼음만 남긴 동민은 그녀를 향해 슬며시 몸을 돌렸다.


-유나야.

-응.

-내가 좋아하는 거 알지?


매일 연락하고 일하는 곳으로 일부러 찾아오는 이성이 심심해서일 리 없었다. 그러나 유나는 알고 있었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는 태권도하는 애랑 사귄다는 말 듣고 네가 아깝다고 생각했어. 그땐 철이 없을 때라 예쁜 애가 왜 그런 놈이랑 사귀나 싶었지.


유나는 갑자기 잊고 있던 사람이 생각났다.


-동창회 나갔는데 네가 없는 거야. 너랑 친하다는 여자애가 늦게라도 올지 모른다고 하더라? 집에 가려다가 그 말 듣고 기다렸는데 진짜 와서 정말 신났지.


동민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 궁금한 거 있어.

-응.

-나랑 상관없이 지금 연애할 생각이 있나 해서. 분명 주변에서 가만 안 뒀을 것 같은데 말이야.


유나는 사장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그럴 관계도 아니고, 동민과 아직 그 정도 터놓을 사이도 아니었다.


-아니면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


사귀자고 물어오면 어떻게 대답할까를 고민했는데 다른 질문에 유나는 따끔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약간 마음이 있었던 사람이 있어. 근데 정리하는 중이야. 왜냐면... 그에겐 여자친구가 있거든.


동민에게 굳이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걸 다 밝힐 수도 없었다.


-고마워.

-뭐가?

-나한테 마음 열겠다는 말로 들려서.


동민은 최선을 얘기하는 유나가 안심되었다.


-누군가를 지우기 위해선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해. 나로 그 공간을 채우도록 노력할게.

동민은 그녀의 눈을 부드럽게 스치고 앞의 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 의도로 날 이용해 줬으면 좋겠어. 천천히 기다릴게.


어두운 조명 때문인지 그녀는 짙은 바닷속에 잠겨있는 기분이었다. 동민에게 미안했지만 또 편하기도 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을 기다리는 다른 남자가 잠시 떠올랐지만 쓸데없는 생각조차 이젠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고마워 동민아.

-바래다줄게. 집으로 갈 거지?


택시 타고 간다고 한 유나를 태워 집까지 배웅했다. 그리고 동민이 다시 차를 세운 곳은 그녀가 일하는 건물이었다.


유나 없는 구두 가게.


-어? 후배님 웬일이야.

-할 말이 있는데 가게에서 할까요, 아니면 잠깐 나가실래요? 유나 얘기입니다.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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