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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마음

by 신선경




세 잔도 안 되는 술에 목까지 달아오른 사장은 택시에서 유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혼자 내리려는데 극구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돌아갔다. 냉장고 문을 열어 오렌지주스를 가득 따라 마셨다. 시큼 달달함이 울렁이는 속을 타고 흘렀다. 유나도 졸음이 쏟아지고 알딸딸했지만, 그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그냥 흘러가게 두면 파도에 휩쓸려 검은 바다로 삼켜질 것 같았다.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치고 펜을 잡았다.



그가 평생 사랑해야 할 여자는 한 명이다.

그게 다른 사람이어선 안 된다.

여러 사람이어서도 안 된다.

나도 아니다...

내가 도와줘야 한다.

아니면, 도망쳐야 한다.

그를 도우려다가 나까지 죽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망쳐야 하지?

그를 향해 말랑해져 있는 내 마음을 굳히는 방법...



유나가 가게를 쉬는 날엔 사장의 아내가 도와주러 나왔다. 그녀에게 연락해 며칠 뒤 약속을 잡았다.


[ 언니! 내일 가게 나오시죠? 점심 저랑 같이 먹어요~ ]


동그란 얼굴에 꾸밈없는 평범한 외모지만 사랑받기에 부족할 게 없는 여자였다.


-유나 씨 쉬는 날인데 데이트 안 하고 나 만나도 돼요?

-이게 데이트죠! 근데 아기는요?

-어머님이 봐주신다고 해서 맡기고 왔어요. 오늘 하늘도 너무 예쁘고! 유나 씨 덕분에 아줌마 호강하네요.

-귀요미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아까 지나가다가 예뻐서 하나 샀어요.

-어머! 뭐예요?


쇼핑백 안에서는 파란색 리본을 두른 하얀색 상자가 나왔다.


-안 그래도 애가 통통해져서 옷이 다 작아요. 고마워요. 색감도 너무 예쁘네요. 역시 센스 있어. 오늘 밥은 내가 살게요!

-아니에요. 언니 맛있는 거 사드리려고 만나자고 한 거예요.

-근데 무슨 일이에요? 나한테 할 말 있어서 보자고 한 거 아니에요?

-특별히 그런 건 아니고요. 지난번에 집에도 초대해주시고 감사해서요. 파스타 정말 맛있었어요.

-과일에 와인까지 잔뜩 들고 와놓고는 무슨요.


적절한 타이밍에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우드 테이블 위로 백색의 도자기 그릇들이 올려졌다. 왕새우 로제 파스타와 루꼴라 피자, 카프레제까지 맛없기 어려운 메뉴였다.


-인별그램 해요?


여자는 휴대폰을 들고 그릇을 요리조리 옮기며 사진을 찍었다. 엉덩이까지 살짝 들었다가 만족한 표정으로 앉았다.


-가끔 친구들 사진 보기만 하고 잘 안 해요.

-난 요즘 이거 하는 낙으로 살잖아요. 애 보느라 잘 돌아다니지도 못하니까.

-그러게요. 언니는 지금이 가장 힘드실 때죠?

-맞아요. 애가 엄한 데를 다 뒤지고 다녀요. 누구 닮은 거지? 가만히 있지를 않아. 어제는 식탁 잡고 서다가 뒤로 넘어져서 응급실 갔다 왔다니까요. 그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어머! 괜찮아요?

-괜찮다곤 하는데 신경이 쓰이네요. 이래서 첫째는 딸을 원하긴 했어요. 아들부터 낳으니 둘째 생각이 쏙 들어간다니까요.


유나는 가장 푸짐해 보이는 피자 한 조각을 그녀의 접시에 얹어 주었다.


-유나 씨는 요즘 만나는 사람 없어요? 지난번에 소개팅한다고 안 했나?

-네. 소개팅했던 사람들은 연락 안 하는데 호감 가는 사람은 있어요.

-어머! 누구누구?? 잘 생겼어요? 연상? 유나 씨 나이에 연하는 좀 그렇죠?

-동갑인데요. 키도 크고 외모도 괜찮아요. 얼마 전에 동창회에서 친해졌어요. 가게 와서 신발도 사고요.

-어머 어머. 유나 씨한테 반해서 가게까지 왔네!! 아 잠깐만요.


여자의 남편에게서 온 전화였다.


-응. 왜? 나 예쁜 아가씨랑 밥 먹는데. 그런 동생 있어! 하하. 맞아. 피자 먹어. 그래, 넉넉히 보내.

-사장님요?

-네. 내가 말 안 하고 나왔거든요. 근데 눈치채고 둘이 맛있는 거 먹으라고 밥값 보내준대요. 유나 씨 덕분에 보너스 생겼어요. 우리 디저트도 맛있는 거 먹어요.


식사를 마치고 근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1시간을 더 있었다. 맑게 웃는 여자를 보며 유나는 가슴 한편이 불편했다. 외면하지 않고 어딘가에 쌓아 올렸다. 목구멍까지 차오르기 전에 비워내리라 다짐하며.

그녀와 헤어진 후에는 동민이와 약속이 있었다. 친척 어른의 장례식을 하는 동안에도 연락은 매일 주고받았었다. 가게에서 본 이후로 둘이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택시를 타니 알려준 주소로 금세 도착했다.


-오는데 헤매지는 않았어?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응. 택시 내리니 바로 보이더라고.

-여기서 보니까 또 기분이 묘하네. 좀 떨린다.


동민은 일하는 곳을 유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몇 년 전 동대문에서 의류 도매업을 하다가 온라인 쇼핑몰을 시작했다. 사진작가인 친형과 같이 작업실을 운영 중이었다.

천장은 답답함 없이 높았고, 새하얀 시폰 커튼 사이로 채광이 바닥에 쏟아졌다. 유나는 가게에 오기 전 백화점에 들러 디퓨저와 손 세정제를 샀다. 쇼핑백을 녹색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동민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 위주로 안내해 주었다. 유나의 눈에는 곳곳에 신경을 안 쓴 곳이 없어 보였다.


-쇼핑몰도 들어가 봤어. 여기서 주로 촬영하는 거야?

-소품 촬영은 여기서 거의 하고 모델하고는 야외를 더 많이 나가. 요즘 날씨엔 새벽에 빨리 끝내는 편이야. 개인 촬영작업은 저쪽에서 해.


스튜디오 전체는 환했지만, 한쪽 벽을 등지고 있는 공간은 차분한 회색 톤의 벽지였다. 신기해하는 유나의 반응이 동민을 더 신나게 했다.


-저번에 주석이네 샵 회원들이랑 여기서 촬영했어. 지금 톡에 프로필 사진 봤지?

-아하 그러네! 사진 깔끔하고 좋더라.

-다음에 유나도 찍어줄게. 지금은 형이 출장 중이라 아쉽네.

-풀메하고 와야겠는데?

-포토샵으로도 충분해.

-스튜디오보다 야외에서 자연스럽게 찍고 싶어. 근데 카메라 좀 부담스러워. 조명 판 있나요?


유나가 웃으며 장난을 쳤다.


-어디서든 예쁠 거야.

-고맙습니다. 저녁 뭐 사드려요?

-내가 예약해뒀어. 하고 싶은 말도 있고.


어쩐지 그는 들떠 보였다.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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