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휴대폰을 새로 산 남편이 바로 달려오지 않을까 소진은 문만 바라봤다. 선우가 돌아가고 얼마나 바닥에 앉아 있었는지 종아리가 물풍선처럼 부풀었다. 한동안 다리를 두드리다 일어섰다. 소진은 운전을 할 수 없어 택시를 잡아탔다. 침대에 누운 채 이틀을 앓았다. 자고 나니 열은 내렸지만 가게는 하루 더 쉬기로 했다.
어제는 선우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 기본으로 바뀌었고 번호는 그대로였다. 소진은 밤새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러다 잠이 들었고 밤새 슬픈 꿈을 꾸었다.
-어머! 야!! 눈이 퉁퉁 부었어.
거실에 있던 지연은 방에서 나오는 친구를 보고 냉장고로 달려갔다. 손바닥만 한 얼음팩을 꺼내 소진 손에 쥐여줬다.
-밤에 라면 먹은 것도 아니고 왜 그래? 얼른 눈에 좀 대고 있어.
-으. 차가워. 그렇게 부었어?
-수제비 붙여놓은 거 같아. 왜 뭔데!
-며칠 잠만 자서 그렇지 뭐. 토요일 아침부터 어디 가게?
-타이어 공기압 센서가 또 말썽이야. 지금 가도 2시간은 기다릴걸. 휴. 이따 가게로 갈 테니까 맛있는 거 먹자. 연하 만난다고 신경 쓰더니 이제 내 거다 이거야? 얼굴이 며칠 굶은 거 마냥 까칠해.
-그래서 남의 거 되려나 보다.
-야야... 그런 농담 별로거든! 오늘이라도 선우 씨 올지 모르니까 팩 좀 하고. 알았지? 전화할게!
-응. 운전 조심해.
호텔도 아니고 내 집도 아닌 곳. 불편하지 않지만, 온전히 편하지도 않은 곳이었다. 엄마보다는 적절히 모른척해 주는 친구가 좋았지만 여기도 소진이 있을 곳은 아니었다.
이혼하면 그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가게도 당분간은 직원을 고용하고 엄마와도 떠나있고 싶었다.
온수를 최대한 위로 틀었다. 욕조가 채워지는 동안 거울 속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볼은 패어있고 초점 없이 뻘건 눈에 피부는 메말라 있었다.
팩을 하나 꺼내 덮었다. 두툼한 눈꺼풀이 더 무거워졌지만 촉촉한 느낌은 기분이 한결 나았다.
곧게 뻗은 다리를 하나씩 담그고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묵직하지만 부드러운 감촉이 배꼽 위로 넉넉히 차올랐다. 눈을 감고 따끈한 물속으로 몸을 더 밀어 넣었다. 고개를 조금만 움직여도 턱밑에서 물살이 찰랑거렸다. 선우의 장난치는 모습이 떠올랐다. 천진한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소진의 마음도 아이처럼 단순해졌다. 팩을 떼어내고 몸을 돌려 누웠다.
2층 | 중고 명품샵
모녀의 점심 메뉴는 미숙이 좋아하는 우렁쌈밥을 시켜 먹었다. 테이블을 정리하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미지근한 공기가 소진의 얼굴로 훅 불어왔다. 각진 얼음을 하나씩 머그컵에 올려 담았다. 에스프레소 버튼에 원두가 위잉 소리를 내며 빠르게 돌아갔다. 고소한 향이 가게 안에 풍겼다.
-뜨거워요. 조심해.
-땡큐.
7월에도 미숙은 따듯한 커피를 마셨고, 소진은 겨울 제외하고는 아이스커피가 좋았다.
-음. 좋다. 딸이 타 주는 커피가 최고야. 이 집 원두는 산미 있는 것도 괜찮았지?
-응. 과일 향이 나서 시큼하지 않고 좋더라. 이따 사 올게.
-그래, 좀 넉넉히 사서 그릇 사장님 댁도 갖다 드려. 아직도 아들 소식이 없다는데 큰일이야.
-응, 알겠어. 엄마, 이번 휴가도 마지막 주로 갈 거야?
-유 서방이랑 네가 이런데 휴가를 어떻게 가.
-그래서 말인데.
출근하며 정리했던 마음을 엄마에게 먼저 꺼내기로 했다.
-주말 아르바이트생 곧 방학해서 평일에도 가능하대. 나 당분간 좀 쉬고 싶어. 선우랑도 그만하고.
-피곤해서 쉰 줄 알았는데 그새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며칠 전에 선우가 가게로 왔었어.
미숙에게 그날의 일을 말하며 소진의 생각이 굳어지는 듯했다.
-더 이상 우린 안 될 것 같아. 엄마한텐 정말 미안해...
-딸, 우선 여행을 좀 다녀와. 가게는 걱정 말고.
-서류 정리하고 집 내놓은 다음에 갈게. 더 끌어봤자 후회할 것 같아.
-유ㅍ서방이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도박이나 사업해서 망한 것도 아니고. 사람이 좋고 아직 친구 좋아할 나이라 그래. 자식 낳고 나이 먹으면 바뀌게 되어있어.
-안 바뀌면? 자식 안 생기면?
-왜 안 생겨. 젊은 니들은 셋도 낳을 거다.
-그보다 서른이면 철이 들어야지. 언제까지 저럴지도 모르는데 참다가 속병만 나.
-이제 1년 살고 그러면 어떡해.
-더 늦기 전에 끝내는 게 낫지.
-소진아. 나는 더한 아빠도 참고 살았잖아. 그 세월 견디니 가족들한테도 떳떳하고 사위한테도 대접받고 얼마나 좋아. 자식한테 흠 될까 봐 산지옥도 버텨냈어, 엄마는.
-...
소진은 뭐로 버텨야 하냐고. 엄마의 체면을 위해 참고 살아야 하는 거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엄마가 아빠랑 사별이 아니고 이혼했어 봐. 너 장사한답시고 명절에 얼굴만 비치고 가는데, 시댁에서 지금처럼 고생한다 할 것 같아? 이혼한 부모 자식이라 못 배웠다 헐뜯을 거다.
-미리 가서 하루 보내다 오는데 뭐. 그리고 돈 잘 버는 며느리는 오히려 대접받지. 요즘 누가 뭐라 그래.
-그래도 그게 아니다 딸. 여자는 돈 많아도 친정 트집 잡히면 평생 눈치 보고 사는 거야. 그게 얼마나 끔찍한 건지 안 당해보면 몰라. 혼자 삭히며 이 악물고 참은 거야. 너 그런 눈치 안 보게 하려고
-그냥 참지 말지 그랬어. 왜 내 핑계를 대. 엄마가 이혼할 용기가 없었던 거 아니야?
소진은 한 번 더 참지 못한 자신을 속으로 욕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에 좀 안 든다고 헤어지는 건 용기니?
미숙도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용기가 없었던 것도 맞았다. 이혼 후에 행복할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었다. 그땐 지금처럼 이혼에 당당할 때도 아니었고, 친정이 여유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결혼하고 아들을 못 낳은 것도 죄스럽던 시절이었다. 미숙은 친정에 살림을 보태며 그만큼 무시와 멸시를 견뎠다. 남편이 죽기 전까지는 저녁에 마음 편히 친구 한 번 만난 적 없었다.
친구처럼 재밌게 사는 부부가 부러웠기에 딸은 다정한 남편 만나 사랑받고 살기를 바랐다. 사위가 처음 인사 오던 날, 큼직한 꽃바구니를 들고 왔다. 미숙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도 생일에 유 서방에게 받은 꽃다발이었다.
사람 좋게 웃는 살가운 청년이 마음에 들었고 딸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소진은 꼼꼼하고 야무지지만 빈틈이 없는 성격이다. 유 서방에게 조금만 더 양보하면 좋겠는데, 임신도 안 되고 여러 가지로 마음에 여유가 없어 보였다.
미숙이 꾹 참고 산 것처럼 자식한테도 그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 정도 사연에 이혼? 말이 안 됐다.
소진이 알면 난리 피우겠지만 그게 대수인가. 미숙도 손 놓고 있을 순 없었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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