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늦은 발행 죄송합니다.)
공항에 승준이 도착하려면 40분 정도 여유 있었다. 화연은 출국장 근처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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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기 와있는 나의 마음은 뭘까?
가슴은 너를...
머릿속에선 누구를...
무엇을 원하는 걸까.
모르겠다면 앞으로 더 가봐야 한다.
가까이 가면 보일 것이고
안 보이면 다시 멀어지면 된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거.
너도 알지?
나는 알거든.
-7월,
누구인지 모를 널 기다리며 공항에서.
‘임시저장이 완료되었습니다.’
* *
3주 전, 화연은 헤어진 연인을 만났다. 짧은 만남 뒤로 몸이 불덩이가 됐다. 결국 승준이와 여행을 취소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승준은 갑자기 잡힌 출장으로 출국했다. 매일 연락을 나눴어도 얼굴을 보는 건 보름 만이었다.
[ 지금 나가~ 복잡하니 앉아 있어. 내가 갈게~ ]
공항은 활기가 도는 정도를 넘어 약간 어지러웠다. 화연은 그제야 본격적인 휴가철임을 눈치챘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카키색 라운드티 위로 환하게 웃는 승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약간 그을린 얼굴색 때문인지 살이 좀 빠져 보였다.
-안 와도 실망하지 않으려고 마음 딱! 먹고 왔는데. 화연아, 나 오버 좀 해도 되나?
그의 팔은 화연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승준의 품에서 다른 얼굴이 떠올라 그녀는 죄책감이 들었다.
-비행기에서 뭣 좀 먹었어? 얼른 가자. 한식 먹고 싶댔지?
-응, 닭볶음탕 얼큰하게. 소맥에다가!
승준이 자동차 문을 열고 화연을 먼저 앉힌 후 트렁크에 짐을 넣었다.
-보험 완료됐어?
-응. 너 피곤한데 운전 내가 해야 하는데.
-컨디션 최고야. 얼굴에 티 나지 않아? 하하
밝은 성격의 승준과 있으면 화연도 편안해졌다. 그리고 승준이 출장을 간 사이 가게 새 임차인이 구해졌다.
-말일 이랬나? 얼마 안 남았네. 꽃집 하는 건 아니랬지? 무슨 업종이래?
-응. 꽃집이면 조금 편했을 텐데. 뭐 하는지는 모르겠어. 보안이 어쩌고 하면서. 인테리어는 짐 빼면 바로 한대.
-요즘은 뭐가 뜨나? 아무튼 잘 됐어. 큰 짐은 내가 친구 차 빌려올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안 그래도 돼. 테이블이랑 의자는 위층 주기로 했고, 진열장 몇 개만 업체 불러 처리할 거야. 화병이랑 식물 남은 건 기증하면 되고. 너도 바쁜데 신경 쓰지 마.
-바쁘지 않고요. 신경은 안 쓸 수 없고요. 어련히 잘하는 거 알아. 그래도 난처한 거 있으면 바로 얘기해 줘. 알았지?
-응. 그럴게. 고마워.
-인사는 뭘 좀 돕고 받게 해주시고요. 근데 오늘 비 온다고 했나? 오랜만에 한국 왔는데 달도 안 보이네.
-그러게. 요즘 달은 잘 보이던데. 우리 어릴 때처럼 별 보기는 쉽지 않아서 아쉬워.
-주말에 별 보러 갈까? 언젠가 얘기했던데 거기. 아... 어디지?
-안반데기?
-응, 거기! 네 말 듣고 사진 찾아보니까 꼭 가보고 싶더라.
-지금은 덥지. 한밤중에도 30도라니까. 다음 주는 더 오를 거래.
-갈수록 여름이 무섭네. 그럼 가게 정리하고 9월? 아무튼 올해 가자.
승준이 둘의 미래를 향해 다짐했고 화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록과 노랑, 자줏빛으로 변하는 인천대교를 진입하자 물방울이 투명한 유리 위로 뿌려졌다. 반듯하고 검은 팔이 5초에 한 번씩 유연하게 움직였다.
빗물 섞인 음악이 흘러나왔고 어둠 속 화려한 조명들마저 차분했다. 두 사람도 잔잔한 파도를 탔다. 과거 어딘가로 이어지는 노래들에 화연의 눈이 깊어졌다.
-승준아.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화연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우리 약속한 다섯 번 중 몇 번 남았지?
-두 번.
승준은 두 번이 열 번 남았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갑자기 앞이 더 캄캄해져 와이퍼를 3단으로 올렸다.
-그치? 내가 여행을 못 가서.
-그건 몸이 안 좋았잖아. 설마 오늘을 네 번째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급하게 들을 생각 없어. 솔직히 평생 안 듣고 싶기도 해.
화연이 허리를 바로 세워 등을 기댔다.
-다섯 번은 안 되겠어. 취소하자.
-... 아직 결정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우기도 했고. 앞으로 다섯 번 더? 아니다! 횟수 말고 연말은 어때? 화연아 나는...
-그냥 지금으로 해.
-응?
-오늘로 친구 사이 끝내자.
신호등의 색이 바뀌었다.
빨간 불.
둘의 관계가 갑자기 종료되는 건 그의 계획 속에 없었다. 농담으로 웃으며 넘어가 볼까, 약속은 약속이라고 정색해야 하나? 승준은 피가 돌지 않는 기분이었다. 당장 차 문을 열고 빗속으로 달려가 버리고 싶었다.
초록 불.
승준의 반쪽 얼굴을 보며 화연은 미소를 보였다.
-시작해보자. 다른 사이로!
남녀를 향해 흔드는 검은 팔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라디오의 볼륨이 차 안을 가득 채웠다.
같은 시간, 책상에 앉은 남자가 ‘고민 톡’에 로그인했다.
제목: 제 친구 좀 살려주세요. <조언 구함!>
20대 후반 남자입니다. 친구에게 결혼하려던 H양이 있었습니다. 이하 H라고 하겠습니다.
친구가 H에게 프러포즈하려는데 갑자기 아이가 나타났습니다. H가 아닌 4년 전 헤어진 여자의 아이입니다. 아이 엄마는 사라졌고 키우고 있던 할머니의 병상으로 친구에게 맡겨졌습니다.
친구는 H에게 말하면 같이 키우겠다고 할까 봐... 아무 말도 못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혼자 감당하려고 했던 결정은 오만이었습니다. 친구는 잘 먹지도 못하고 아무 의욕도 없이 지냅니다.
H는 곧 멀리 땅끝마을로 떠난다고 합니다.
이대로 남자는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지,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봐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혹시... 사랑한다면 받아줄까요? 거절한다면 그때는 미련을 버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제 친구가 너무 이기적인 걸까요?
진지한 답변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익명] 솔직하게 얘기하고 선택은 여자분에게 맡기라고 하세요
[익명] 미친 거야?! 그냥 혼자 책임지고 조용히 살아라.
ㄴ 이게 맞지! 이제 마음 정리 다 하고 떠나는 여자한테 왜 그래!!
ㄴ 그니까요~~ 애 엄마를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은은***] 헐.........이게 무슨일이지 .......
숨겨져있던 아이의 존재를 알고 여자랑 이별한거예요....?????
비겁한 변명입니다아!!!!!!!!!!!!!!!!!!!!
[융*] 흠... 혹시 아이의 출생의 비밀이.......?
ㄴ 친자검사 해봄?
ㄴ 와… 자기 애 아니면 이 남자 어쩜…
[해피**]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이별하고 갑자기 나타나서 아련하게 대하는 건 비겁합니다!! ㅎㅎㅎㅎ
[프리지아**] 숨겨둔 아이가 있었구나? 그래서 갑자기 말없이 떠났나보네~~
[헤요*] 청혼까지 할 사이였다면 어떤 상황이든지 말을 해주는 게 예의 같은데. 친구가 예의가 없구만요. 뭐 물론 사정이야 있겠지만,,,, 사정을 말 안하고 이별통보를 하다니..
여자가 다른 사람 만나서 행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솔*] 이궁. 이미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
[익명] 초딩?? 드라마 작가 되고 싶어? 이런건 너무 흔해!!! 뻔해! 다른 재능을 찾아보거라~~
[익명] 친구분 사연은 안타깝지만 인연이 아니신 듯 합니다.. 잘 위로해주세요.
ㄴ 친구아니고 쓴이 얘기 아님?
ㄴ 백퍼지
[가면**] 살아보니 이런 경우가 많더라고요ㅜㅜㅜ
알기 전엔 쉽게 말했지만 알고 나니 선택하기 어려운 마음이 이해가서...
창밖으로 빗소리가 거세졌다.
달이 가려진 밤, 밤새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렸다.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