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 | 맞춤 수제화
-동민씨. 이따 가게로 바로 와요. 우리도 일찍 마감하고 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근데 형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자주 뵐 텐데요. 하하하.
유나가 창고까지 들리는 동민의 웃음소리에 서둘러 나왔다. 깔창과 주문서를 쇼핑백에 담아 동창의 손에 건넸다.
-뭐가 그리 재밌어?
-이따 가게 끝나고 형님이랑 셋이 식사하기로 했어.
-셋이라니?
-응. 오늘 좀 일찍 닫자.
사장은 활짝 웃어 보였다. 유나가 말을 덧붙이려는데 가게 문이 열렸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하늘색 투피스 정장 차림의 중년 여성이 남자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혼자 오셨어요? 따님도 직접 신어보시는 게 좋은데요.
남자는 동민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손님과 안쪽으로 사라졌다.
유나가 동민을 배웅하고 주문서를 작성했다. 오늘 예약 건들을 체크하며 고객들에게 문자를 발송했다.
-혹시라도 불편하신 점 있으면 바로 전화 주세요.
-항상 잘 맞는데 뭐. 고마워요.
문밖을 향해 남자가 허리를 굽혔다. 가게 안에는 다시 사장과 유나뿐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같이 밥을 먹자는 거야?
-학교 후배에게 밥 한 끼 사는 게 왜.
-평소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는데 후배는 무슨?
-성격 좋아 보이더라. 우리 가게 단골 고객이 되겠다는데 친해져서 나쁠 거 없잖아.
유나는 말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자신의 썸남을 차단하려는 건가? 10년을 넘게 봐 온 남자는 불리한 상황을 만들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속셈을 알 수 없었다. 동민이에게 전화해서 취소해 버릴까, 아니면 퇴근하고 둘만 만나자고 해야 하나. 고민할 시간 없이 유나의 고객들이 연이어 방문했다. 마지막 손님을 보내니 약속한 시간이 얼마 안 남아있었다.
-이제 오실 분 없지? 청소는 내가 아침에 할 테니까 짐 챙겨서 나와.
남자는 서둘러 입구 쪽과 중앙 불을 껐다.
셋이 만나기로 한 가게는 매장에서 200미터쯤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유나는 그의 뒤에서 두 걸음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갔다. 동민에게 남자가 이상한 말을 꺼내진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최악의 경우엔 동창들에게도 소문이 퍼질지 몰랐다. 유나는 떳떳하지 못할 행동을 했는지 곱씹었으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익숙한 건물이 보였고 2층에 위치한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남자의 단골집이었고 유나도 오늘로 세 번째 방문이었다. 적당한 소음과 은은한 조명 때문인지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자줏빛 기모노를 입은 직원이 가볍게 목례 후 앞장서 걸었다. 빈자리가 안 보이는 홀을 지나 창가 쪽의 중앙 룸이었다. 의자에 앉으니 직원이 메뉴판을 올려두고 문을 조용히 밀어 닫았다.
미색의 여닫이문에 매화나무와 작은 분홍 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테이블 위로 주황빛 조명은 붉어진 뺨도 부끄럽지 않게 돕는 역할을 했다.
-우리가 먹던 거 괜찮지? 아니면 친구 오면 주문할까?
-응. 8시 다 되긴 했어.
-사케로 한잔할까?
-오빤 먹지도 못하잖아. 내일 일해야 하고 맥주 마실게.
직원은 뚜껑을 오픈해 주고 예의 있고 지체 없이 사라졌다. 남자가 맥주로 잔을 채우는데 유나의 휴대폰이 울렸다.
-동민아. 우리 도착했는데 어디야?
"유나야. 미안해서 어쩌지... 큰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부모님 모시러 가는 길이야."
-이런... 아, 그래? 아니야. 전혀 신경 쓰지 마. 네가 마음이 안 좋겠다. 응, 운전 조심해서 다녀오고. 알겠어.
-무슨 일 있데?
-응. 큰어머님이 암으로 입원해 계셨다네. 천안으로 장례식장 가서 못 온다고 형님한테도 죄송하다고 전해달래.
-당신 아쉽겠네.
-뭐가 아쉬워. 오빠가 이상한 소리 할까 봐 걱정했는데 잘 됐지. 뭐.
-내가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해?
-그건 모르지.
유나는 진짜 남자의 속을 몰랐다. 거품이 얇게 덮인 잔을 입으로 가져가니 그가 잔을 톡 소리 나게 부딪쳤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유나는 대답 없이 차가운 맥주를 꿀꺽 넘겼다.
-너도 나 좋아하는 거?
장난기 담긴 말투에 대답 대신 유나는 오른손을 턱에 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가 기분 좋게 웃었다.
-부정은 안 하네.
은행 꼬치와 저민 생강, 유자 드레싱이 올려진 샐러드, 갓 튀겨 노랗고 큼직한 새우와 대하 튀김, 슬라이스 전복회, 미역국 등이 촘촘하게 차려졌다. 둥글고 매끈한 돌 위에 윤기 나는 자연산 참돔과 노릇하게 구워진 도미 머리는 유나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였다.
-이 안주에 사케 드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남자는 유나의 취향을 잘 알고 맞췄다. 간혹 표정이 어두워 보이면 백화점으로 달려가 남은 망고가 네 개뿐이라며 아쉬워했다. 두 개면 충분했을 건데도 전부를 사 오는 그였다. 지쳐 보이면 일찍 귀가시켰고, 신상이 나오면 신겨주었으며, 스틸레토 힐도 색상 별로 그녀 것이었다.
남자의 손에서 초록빛 묵직한 병이 열렸다. 코를 가까이 가져가 보더니 이내 한 뼘 멀어진다. 기울어진 병은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유나의 손과 가까워졌다. 꽃 모양 도자기 잔에서 맑은술이 찰랑거렸다.
-오빠는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아깝게.
-남기면 되지. 전혀 안 아까워.
달콤하고 부드러운 감촉, 쫀득하고 쫄깃한 생선 살의 조화는 유나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의자에 비스듬하게 기댄 남자는 꼿꼿한 그녀만 들리게 목소리를 냈다.
-좋다.
-뭐가?
-둘이 이렇게 있으니까.
찬물을 확 뿌리려다 입을 다물었다.
-당신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선배님.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피식 웃었다. 맥주 반 잔과 사케 한 모금에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홀짝홀짝 마시는 유나를 그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나는 그의 두 눈에 담긴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지 생각했다. 사케보다 촉촉한 눈빛, 그래서 외면하지 못하는 걸까. 사랑에 빠진 사람이 이토록 불편한 적이 없었다.
이 남자를 어쩌면 좋을지 누가 좀 알려주면 좋겠다.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