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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풍에서 터보풍

by 신선경






작년, 11월을 며칠 남겨두지 않고 있던 날.

그에게도 시린 바람이 괴롭힐 수 없던 짧은 계절이 있었다.


-형. 뭐가 더 우리 화연이에게 어울릴까?

-야. 내가 여자도 아니고 어떻게 안다고 묻냐.

-형도 결혼할 때 반지 사봤을 거 아냐?

-우리 땐 그냥 큰 게 최고였어. 요즘도 그래?

-아닐걸? 흠.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고객님. 걱정하지 마세요. 착용하지 않으신 상품은 교환 가능합니다.


두 남자의 답을 알 수 없는 고민이 여기서는 어렵지 않게 종결됐다.

그녀와 한강변 바에서 와인을 마시던 날,

옆 테이블에서 어떤 남자가 전형적인 프러포즈를 했다. 여자는 장미꽃 한 다발을 품에 안고 이게 뭐냐며 붉은색 하트 케이스를 열었다. 남자가 여자 손가락에 딱 맞는 반지를 끼워주었다. 가게에서 주인공이 된 여자는 연인의 어깨에 기대 미소로 훌쩍였다.

화연은 힐끔거리고 말았지만 주황색 조명 아래 부러움이 비쳤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구체적인 청혼계획을 세웠다. 아까 본 남자와 특별히 다를 건 없었다. 화연의 집을 꽃으로 채우고, 단아하지만 우아함이 묻어나는 반지. 그리고 손 편지를 쓰기로 했다.


반지를 고르는 일보다 작가 여자친구에게 쓰는 편지가 더 어려웠다.

'당신이 안 보이는 시간이 늘어가는 게 힘들어'

하루 종일 고민 끝에 한 줄을 완성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거절한다고 해도 상처받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매일 고백하고 프러포즈할 거니까.

그녀의 성격상 거창한 결혼식은 하지 않을 테니 식장 예약 때문에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어디 한적한 펜션을 잡아도 상관없을 일이었다.

내년 6월에 약속한 유럽 여행을 신혼여행으로 가면 좋겠다는 바람도 잊지 않았다.

그녀와의 계획은 완벽했는데 첫눈이 오기 전, 프러포즈 대신 이별을 고했다.


-당신, 아니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

-다섯 살이나 많으니 누나가 맞는데 그냥 이름 불러. 얼굴만 보면 그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겠어.

-내가 좀 노안인가? 하하


8개월 만에 나타난 그는 10년이 지난 미래에서 온 것 같았다. 생기가 돌던 피부였는데 바게트를 한 달은 식탁에 올려둔 것처럼 까슬했다.

-일 힘들진 않고? 손 아직도 상처 많이 나? 소독 잘해야 하는데.

-가게는 다음 주면 정리해. 내놓은 지는 오래고.

-그랬구나. 그럼 이제 글만 쓰려고?

-이제 와서 왜 만나자고 한 거야?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연락도 없어서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얼굴 보니 그렇지도 않았겠다 싶네. 혹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화연은 자신이 뱉은 마지막 말을 상대가 못 들었기를 바랐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었다.


-당신한테 상처 준 것 말곤... 아니, 아무 일 없어. 그냥 한번 보고 싶었어. 나와줄 거란 기대도 못 했는데 이렇게 보니 좋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쓴 커피를 두 모금 꿀꺽 넘겼다.

-그리고 그땐 미안해. 만나서 얘기했어야 했는데...

-사과하려고 한 거면 늦은 것 같아. 이미 기억도 잘 안 나고.

고개를 숙인 그는 흔들리는 커피를 바라봤다.

-지금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아, 잠깐만. 이거 당신 생일 때 주려고 샀던 건데 늦었지만 받아줄래?


그가 꺼내 둔 목걸이 케이스.

화연은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차가운 커피로 뜨거운 덩어리를 내려보냈다.


-아니, 받을 이유가 없잖아.

-그런가. 근데 당신 말곤 주인이 없어서.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일어날게.

화연은 틈도 안 주고 일어나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뒤도 안 돌아보는 그녀를 보며 오늘 만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놓아야 할 차례’

그때도 조용히 사라지는 게 상대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다. 솔직히 얘기하면 화연은 미련하게 다 받아주겠다고 할까 봐. 지옥은 혼자 가겠노라 지금도 이를 악물었다. 너무 세게 물었을까, 입안에서 비린 맛이 났다.

화연에게 연락하기 며칠 전 선배를 만났다.

-오늘도 일찍 닫았더라.

툭하면 취해있던 동생을 안쓰럽게 본 선배는 매주 꽃을 사며 그녀의 소식을 전해줬다.

-내가 말이야, 회사에서 여직원들에게 말이야. 아 됐고! 아무튼 나 변태 취급하는 것 같더라. 집도 아주 꽃밭이야.

-그래. 형 이제 그만해.

-그보다 이젠 이것도 끝이 보이는 것 같다.

-가서 이상한 소리 한 건 아니지?

-응. 매주 가면서 아무 말도 안 하지. 그러니 더 이상하지.

-잘했어. 고마워.

-가게 내놨다더라.

-아, 그래...

-진짜 후회 안 하냐. 솔직하게 얘기해 보는 건 어때? 네 잘못 아니잖아, 우혁아.

본격적인 겨울도 오기 전, 11월이 그렇게 추웠던 건 27년 만에 처음이었다.

두려웠다. 화연에게 함께하자고 애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 매몰차게 떠나기로 결심했다. 곁에 있는 것이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 거니까.


꽃집을 정리하면 정말 못 보게 될 것 같아서 문자를 보냈다. 만약 나와준다면 솔직히 얘기하고 붙잡아 볼까. 이기적인 걸까? 그래도... 욕심부려 볼까.

8개월 동안 하루도 기억나지 않은 적 없고 매일 뜨거웠던 그의 심장 주주. 우혁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렸다.

마주 앉은 시간은 고작 20분.

살은 좀 빠졌지만 여전히 옆 테이블의 관심을 끌 미모였다.

지난 시간을 터놓고 그녀에게 안기고 싶었다. 그러나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예상한 것 그 이상으로 아무것도 솔직할 수 없었다.

이젠 진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달려오는 아이를 우혁이 번쩍 들어 안았다. 화연의 뒷모습이 생각나 더 힘주어 안았다.


-아빠 울어? 왜 울어? 내가 늦게 와서 그래?

-응. 너무 보고 싶었어.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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