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재산이 꽤 되거든~ 유나씨는 그냥 사모님 소리만 들으면 돼~~ 인물도 괜찮더라고! 오호호홍~~’
유나 보다 한 살 많은 서른 살 1번 남자, 반듯한 가르마 아래로 크지 않은 눈이 안경 때문에 더 가늘 게 보였다.
다정함이 중요하다고 했던 원장님 아니던가? 처음 소개받은 사람은 결혼의 일부 조건만 갖춘 듯했다. 유나는 소개팅이라 생각했으나 상대는 맞선자리로 나왔다.
-재건축 들어간 아파트 있어요. 아, 대출은 없고요. 월세나 오피스텔 살다가 완공되면 거기서 살아요. 겨울에 식 올리는 걸로 생각합니다. 혹시 아이는 몇 명 생각하세요?
당장 예약 가능한 웨딩홀까지 나열하며, 첫 만남에 자녀계획까지. 남자는 이미 몇 번 해본 대사를 외우듯 술술 말을 이었다.
-저는 외동으로 컸다 보니 자식은 셋쯤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결혼해도 계속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아이들 학교에 가 있을 때만 하면 좋겠습니다. 제가 집에 들어오기 전에는 당연히 와 계실 테고.
연필로 쓱 그어놓은 듯한 두 눈에 힘이 느껴졌다.
궁금하지 않은 말을 듣고 앉아서 ‘네, 네’만 하려니 50분이 5시간처럼 느껴졌다. 유나에게 번호를 물었으나 당장은 결혼도, 아이 생각도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어색한 미소로 그를 먼저 보냈다. 아이스커피에 얼음물까지 다 마셨는데도 갈증이 올라왔다.
-시럽은 빼주시고 얼음 많이 부탁드려요.
주문한 음료가 바에 올려지자 빨대로 한 번 휘젓고 그 자리에서 쭉 들이켰다. 자몽에이드가 뇌에서 폭죽 터지듯 퍼졌다. 유나는 빨대를 문 채 턱을 빙빙 돌렸다. 달그락달그락. 한 시간 들은 돈 자랑보다 이 소리가 안정감 있게 들렸다. 입을 떼고 손목을 흔들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이제 갓 취업하긴 했는데, 항공사니 둘이 여행도 잘 다닐 수 있고 얼마나 좋아~~ 아휴 부러워 유나씨~~ 잘되면 나도 좌석 업그레이드 좀 되려나? 농담이야 농담! 오호호홍’
2번째 소개팅 상대는 유나보다 2살이 어렸다. 선크림 바른 동그란 얼굴에 반달로 쌍꺼풀진 눈이 애니메이션에서 나올법했다. 양 볼은 살구를 올려놓은 것 같았다.
-지금껏 공부하느라 연애는 안 해봤지만... 엄마가 여자 말만 잘 들으면 된다고 하셨는데 그건 제가 자신 있거든요. 누나같이 예쁜 사람이면 정말이요. 이젠 취직도 했으니까 열심히 돈 모으려고요! 부모님이 주신 건 나중에 쓰고요.
-근데 항공사면 어리고 예쁜 승무원들 많지 않아요?
-아, 혹시라도 사귀다가 헤어지면 곤란하고... 엄마가 사내 연애는 단점이 많다고 하셨어요. 누나 이상형은 어떤 남자예요?
고개를 숙여 아이스티를 마시는 모습이 왜인지 짠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이상형과 멀다는 것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나중에 여자친구 생기면 고민 상담하고 싶다는 그에게 번호를 주고 나왔다.
유나는 신발가게에서 일주일 중 하루를 쉬고 있다. 그걸 아는 4층 원장이 두 명을 이어서 잡아주었다. 시간 낭비 말고 빨리빨리 골라 연애하라며. 그러나 예상을 뛰어넘게 빨리 지쳤다.
앞으로 원장님께 소개받는 건 그만해야 할 것 같았다. 내키지 않는 만남에 기가 빨리기도 했지만, 이성에게 적극성을 보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건 자리를 만들어 준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편하게 대화가 오가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웃을 수 있는 사람. 하필... 또 그가 생각났다.
이대로 집에 가면 자꾸 오는 그의 문자에 답장할까 봐 메시지 온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딘데?
-민유, 끝났어?! 데이트 안 하는가 보네. 주소 보낼게, 여기로 와!
오늘은 고등학교 동창회가 있었다. 유나의 친구는 몇몇과 자리를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졸업 후 처음 가는 자리라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시원한 맥주는 간절했다.
이동하는 중에도 사장은 계속 문자와 전화를 했다. 오늘 애 엄마가 친정에 갔다며 심야 영화 보러 가자고. 택시에서 내리며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했다.
-소개팅은 어땠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끝내야겠어.
인희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너 그럴 줄 알았다! 나나 해줘라. 난 현모양처가 꿈이잖니?
-이번엔 진짜 헤어졌어? 지난달에 애들 불러서 펑펑 울어 놓고 바로 다음 날 같이 있었잖아. 한두 번이어야지.
-아 이젠 진짜. 그 자식이랑 완전히 끝이야! 전화도 안 와. 지 잘났지 아주.
그녀는 휴대폰 화면을 톡톡 건드렸다가 깨끗한 화면을 보고는 고개를 획 돌렸다.
-맥주 마셔, 소주 마셔? 나 누구인지 기억나?
흰색 셔츠가 유나에게 상체를 기울이며 물었다. 앉아 있어도 키가 꽤 커 보였다.
-응. 현빈이? 성이 이였나 김이었나.
-오... 하나도 안 맞았어.
-미안. 나는 하이네켄.
-유나야. 내 이름은 알지?
진한 남색 라운드티가 자신 있게 물었으나 유나는 이번에도 맞추지 못했다.
-야. 이름 그까짓 거 모르면 어떠냐? 10년 전이고요. 우리 같은 반인 적도 없잖아. 나도 병맥 코로나!
인희가 직원을 불러 맥주를 추가로 시켰다. 넷은 3학년 때 제2외국어 수업을 같이 들었었다. 학교 다닐 땐 왜소했던 주석이는 지금은 PT샵 대표에 어울리는 몸이 됐다. 동민이는 그때도 키가 큰 편이었고 스키니한 몸매도 그대로였다.
기네스, 코로나, 하이네켄, 아사이가 탁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오랜만에 동갑내기 친구들과 있으니 유나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인희는 다이어트 실패담에 대해 주석이에게 열변을 토했고 그는 식단의 중요성을 강의하고 있었다. 여자 키 171cm의 시선을 끄는 미인이지만 한 덩치 하는 인희였다. 유나는 그녀가 곧 PT샵 회원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결혼하려고 소개팅한 거야?
동민이가 유나에게 병을 들어 올리며 말을 붙였다.
-그런 건 아니고 연애 좀 해볼까 하고. 근데 소개팅은 영 안 맞네.
-나도 헤어진 지 10개월 다 된 것 같아~ 2년 정도 만났었는데.
-왜 헤어졌는데?
-좀 뻔한데. 성격 차이라고 해야 하나. 난 돌아다니고 여행하는 거 좋아하거든. 근데 전 여자친구는 어디 가는 걸 싫어했어. 내가 가는 것도 당연히 반대했고.
-아쉽네.
-몰래 갈까도 생각해 봤는데 그건 안 내키더라. 넌 여행하는 거 좋아해?
-응, 작년엔 인희랑 유럽 여행 다녀왔었고~ 요즘은 가게 일 때문에 휴일엔 집에서 쉬는 편이야.
-여름휴가는 따로 있지?
-글쎄. 아직 얘기는 안 해봤어. 넌 어디 가?
-난 여름이 바쁠 때라 휴가철 지나서 사람 덜 몰릴 때 가려고. 부산으로 갈까 해. 통영도 들리고
-생각만 해도 좋다. 동해도 좋지만 남해는 뭔가 더 낭만적이야. 멀어서 그런가? 하하. 아무튼 사장님이라 좋네.
동민이는 사진작가인 친형과 스튜디오를 운영한다고 했다.
-어, 이 노래 오랜만이다.
-해요! 맞지?
-오 맞아! 이 노래 아는 사람 흔하진 않은데.
둘은 말없이 고개만 약간 까딱였다.
그녀와 나는요 그땐 참 어렸어요
많이 사랑했고 때론 많이 다퉜었죠
지금 생각하면 모두 내 잘못이죠
마지막 그날도 그녀는 울었어
나는 그녀를 잡지 못했죠
지금까지도 너무 후회가 돼요
그 후론 누굴 사랑한 적 없어 아직은
그녀와 나는요 언젠가 만날 거죠
변해버린 모습 변해버린 시간 속에
하지만 괜찮아 내 눈엔 아름답던
예전 모습 그대로일 거예요
그녀도 날 못 잊을 거야
나는 믿어요 그만큼 사랑했죠
그래서 우린 한 번은 만나야만 해요
-유나야. 같이 갈래? 바다 보러.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