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동 이자카야 룸.
여자 둘이 앉은 창가 쪽 테이블에 반쯤 비운 소주병과 맥주, 과일 안주가 놓여있다.
-선우씨가 나쁜 짓 할 사람은 아니잖아.
좋아하지도 않는 술잔을 계속 비우는 것 보니 그녀의 말은 위로가 안 된 것 같았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겠지?
-아까 카드 문자 왔어.
-어디? 노래방?
-모텔.
소진은 소주잔을 들었다. 지연도 이어 비워냈다.
-하! 설마. 아니겠지...
-응. 여자랑 그런 건 아니야. 취한 사람 방 잡아주고 회장님 비서 노릇하고 있는 거지. 나한테는 미안해서 연락할 엄두도 못 내고
-그게 문제네!
-응... 그게 큰 문제지. 확실하게 바람이라도 피우면 내가 미련 없이 정리할 수 있는데.
-그게 그렇지도 않더라.
-아. 그런가... 네 앞에서 쉽게 말했네, 미안
지연은 기본 안주로 나온 색깔 뻥튀기 중에 빨간색을 집어 입으로 쏙 넣었다.
-새삼 뭐. 그냥 계속 생각이 나는 거지. 다른 남자 만날 때 더 생각나는 거 알아? 하하... 오히려 일이 바쁘면 다행인데, 자려고만 누우면 뭐 좋았다고 어리숙하게 웃는 그 표정이... 알잖아!
-알지. 그래서 그날 네 얘기 듣고 우리 모두 무척 놀랐지. 안 믿겨 지금도.
소진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단짝인 지연은 남편의 외도로 결혼 6개월 만에 이혼했다.
3년 연애하는 동안에 언제 봐도 순박했고 일밖에 모르던 남자였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순정남으로 불렸는데, 지연이보다 5살이나 많은 회사 상사와 그렇게 되다니. 길에서 새똥 맞은 것처럼 얘기하는 친구를 보며 나머지 여섯 명은 아무 위로도 하지 못했다.
3차였던 노래방에서 나와 편의점 앞에 캔맥주가 셀 수 없이 구겨질 때쯤 일곱 명은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다 같이 지연이네서 자고 점심까지 먹고 왔었다.
처음 결혼했던 친구가 이혼녀가 됐다. 소진은 자신이 두 번째가 되려나 싶었지만, 지연이 얘기 들었던 날보다 슬프지 않았다.
-노래방 갈까?
-아니야. 내일 물건 많이 들어와. 엄마 쉬는 날이라 일찍 나가야 해. 이만 일어나자.
반포동에서 임대 사업을 하는 지연의 부모님은 외동딸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것이었던 신혼집은 이혼 후 처분하고 34평 오피스텔형 아파트에 살고 있다. 산더미같이 쌓인 살림들이 눈에 거슬렸으나 소진이 누울 침실은 텅 비어 있으니 고마웠다.
이곳에 있은 지도 며칠째인지, 그녀는 편히 있으라고 했지만 20대와는 상황이 달랐다. 지연은 이미 잠든 듯했고 간혹 오토바이 소리 외엔 조용한 밤이었다.
술은 200ml 4잔이었지만 섞어 마신 탓인지 눈을 감아도 빙빙 돌고 있는 기분이라 다시 눈을 떴다. 휴대폰 알림 창은 깨끗했다.
[ 70,000 스카이 모텔 ]
소진은 남편을 믿었지만, 다시 본 메시지에 나쁜 상상이 들어 힘주어 눈을 꼭 감았다.
다음 날 아침.
식탁 위에 지연이 마시고 나간 탄산수가 올려져 있다. 말 안 듣게 생긴 빈 병을 분리통에 밀어 넣고 냉장고를 열었다. 연노란색 비타민워터가 보인다. 소진을 위해 그녀가 사다 둔 음료였다.
음악 없이 운전하는 출근길. 반팔 차림으로 아침 8시에 나서도 춥지 않은 6월이었다. 10센티쯤 연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덜 마른 머리카락과 나부낀다.
위장에 주유하듯 밍숭한 에너지를 쭉 흘려보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익숙한 남자가 소진의 가게 옆에 서 있었다.
2층 | 중고 명품샵
-어제 술 마셨구나? 여보 술 마시면 그거 마시잖아. 나는 그거 먹으면 더 토할 것 같더라고.
-무식하게 많이 마시니 그렇지.
-응. 그렇지... 끊어야 하는데 마셨다 하면 이게
-이거 보이지? 나 오늘 정리할 거 많아.
소진과 선우가 가죽 소파에 마주 앉았다.
-어젠 정말 미안해. 폰이 이 모양이 됐어...
테이블에 올려둔 그의 휴대폰은 잘게 부순 얼음판처럼 으깨져 있었다.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전화하던 후배는 상대가 안 받으니 전화기를 던졌고 선우의 폰으로도 계속 걸었다고 했다.
-내꺼로 해도 계속 안 받으니까 바닥에 치려고 하더라고. 재빨리 낚아챈다고 했는데...
그리고 모텔에 재울 수밖에 없었다며 계속 말을 늘어트렸다.
-집도 모르고 거기에 여자를 혼자 둘 수 없고... 모텔 휴게실에서 있다가 아침에 깨워서 택시 태워 보냈어.
후배 보내고 바로 가게로 왔다는 그의 말에 소진은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결단은 내려야 했다.
-모텔에서 전화 못 해? 문자 하나 못 남겨?
-여보가 많이 화낼 것 같았어. 당장 오라고 할 거고 난 후배 혼자 두고 갈 수 없으니 서로 말다툼만 할까 봐.
-그러니까... 당신은 계속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랑 잘 살아.
-무슨 말이야?
-각자 원하는 대로 살아야지.
소진은 여자랑 있었던 것보다 자신을 못 믿는 남편에게 서운했다.
모텔에서 자기랑 같이 있자고 했으면 안 됐을까? 왜 걱정하게 만드는지 이해가 안 돼서 답답했다. 내뱉고 싶은 단어를 꾹 참았다. 어제 마신 소맥이 김빠진 채 코끝을 쏘았다.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