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어지자. 빚, 부모님... 모두 핑계잖아? 나 좋다는 사람 만날 거야 ]
[ 이미 소개팅도 잡아뒀어. 나 외로운 건 못 참잖아 ]
[ 안 잡을 거 아는데..
그래도 오빠 얼굴 볼 용기는 없어. 답장해도 안 만날 거야. 일부러 애쓰지 마~ ]
1주일 전, 여자친구에게 와 있는 이별 통보에 승준도 답장을 했다. '고맙다'는 말 외에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최대한 미안함을 표현해 보내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마음 정리가 끝나있었다. 번호를 삭제하려다가 저장된 이름만 변경했다.
출근길에는 장대비가 쏟아졌는데, 어느새 온 세상이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갔다.
화연과 한잔하던 날도 비가 내렸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그녀는 승준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해병대 휴가 나왔던 날도 잊었을지 모르겠다.
가족들과 집에서 저녁을 먹자마자 아버지 차를 끌고 화연의 동네로 갔었다. 승준과도 동창인 남자친구와 화연이 2년 교제 끝에 헤어졌다. 이런저런 장난 섞인 말이 오가다 바다가 보고 싶다는 말에 강원도로 직진했다.
바다 위로 해가 뜨고 있었다. 졸리다는 핑계를 대며 승준은 계획에 없던 숙소를 잡았다. 화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넓지 않은 방에 이불까지 덮고 누웠다.
이때 승준은 솔직하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생이자 이등병은 완벽한 여자 앞에서 작아졌다. 안고 싶은 뜨거운 마음을 남자답게 식혀야 했다.
운전하려면 어서 자라며 화연이 옆에서 작게 TV를 틀었다.
잠이 올 리 없었고 둘은 한 시간 후쯤 일어섰다.
-너, 내가 봐줬다.
문밖을 나서기 전 승준이 화연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엉성한 표정을 지었다.
-미친. 뭘 봐줘! 죽을래?
스물두 살 화연은 문을 확 열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돌아가는 차 안은 칸쵸와 홈런볼의 단내가 가득했다. '아' 하면 화연이 하나씩 넣어주던 달콤함이 아쉬움을 달래줬었다.
이젠 군인도 학생도 아닌 그는 자신있게 휴대폰을 들었다.
[ 화연아 나 헤어졌어 ]
최소한의 예의라고 여겨 1주일을 참고 기다렸다.
[ 주말에 바다 보러 가자. ]
1층 | 화 (꽃)
[ 술 사 줄 테니 가게로 와~ ]
승준의 문자에 화연은 답장을 보내고 마지막 예약 손님의 파란 수국 다발을 무인 픽업 케이스에 넣었다.
-이건 꽃말이 뭐야?
하늘색 10부 데님 팬츠에 흰색 라운드티 차림의 그가 화연을 따라 들어왔다. 싱그러운 폴로 향수가 꽃들 사이사이에 앉았다.
-얼마 전에도 물은 거 알지?
-아 그랬나?
-사과의 의미도 있지만 신비로움과 신뢰하는 사랑이란 뜻.
-맞아. 신뢰하는 사이, 신비한 사랑. 그러니 신뢰하는 화연씨! 이 파란 수국처럼 푸른 바다를 보러 갑시다.
-자꾸 바다는 무슨~~ 헤어져서 마음이 허해? 우리가 스무 살 애니? 술이면 몰라도 바다는 아니다.
가게 문을 잠그며 둘은 익숙한 방향으로 걸었다.
-헤어지기 전에도 허했어.
-그래 이해해... 부모님 빚 아직도 많이 남았어? 힘들면 티 좀 내 너도. 안 그래도 아까 가게 보러 왔었어. 느낌이 나쁘지 않아. 가게 팔리면 너 빌려줄 돈도 좀 될 거야.
승준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건... 좀 그런가? 우리 사이에 뭐 어때.
-그 문제는 너랑 얘기할 건 아니고. 나 이제 솔직해지려고.
-뭘?
약간 긴장한 화연은 최대한 가벼운 표정을 지었다.
-너 좋아해.
-응 나도.
손님 아닌 친구에게 영혼 없는 말을 할 줄이야. 습한 온도에 어색한 공기를 더하기 싫어서 냉큼 그의 말을 덮어버렸다.
-말고.
그러나 승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전혀 눈치 못 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동성친구와는 다른 편안함이 좋았다. 거르며 말하지 않아도 서운해하거나 상처받지 않는 남자 사람 친구. 승준은 그런 남사친으로 깎이는 점수가 없었다.
그런데 연애를 하자니.
이런 애매함으로 바다는 말도 안 됐고 그 좋아하는 술도 마실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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