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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작

by 신선경






승준이 싫은 건 아니다.

부모님 빚은 전 여자친구와 결혼을 미루려는 핑계였다고 계좌 잔액까지 말하는 남자. 글 쓰느라 돈을 못 번다고 잔소리할 사람도 아니었다. 단지 마음자리가 깨끗이 비어있지 않은 게 화연을 불편하게 했다.

그 마음까지도 눈치챈 승준은 빠르게 애쓰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지금보다 자주 만나며 조금씩 더 가까워지는 사이를 바랐다.


이미 편하고 친한 친구와 더 가까워진다는 건 어떤 걸까? 화연은 밤새 잠을 설치다 가게 문을 열었다.

남자가 가게로 들어온다. 지난주에는 안 오길래 애인과 헤어졌나 싶었는데 다시 그 손님이다. 매번 전화로 예약하더니 오늘은 어쩐 일이래. 급히 상대가 바뀌었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가늘게 떠졌다.


-오늘도 꽃 살 수 있을까요?


어제 일찍 닫아서 꽃은 여유 있었다. 연분홍 장미에 보라색 리시안셔스를 믹스해 새하얀 포장지로 둘렀다.


-사장님 혹시 가게 옮기시나요?


그가 꽃과 관련된 것 외에 질문을 한 건 처음이었다.


-아니요. 그만하려고 내놓긴 했어요. 어떻게 아셨어요?

-왜요?

-뭘요?

-가게 왜 그만하시나 해서요. 혹시 결혼하시는 건 아니죠?


뭐지... 미혼인 걸 확신하며 묻는 남자의 태도가 의아했다.


-아니요. 제가 꽃을 안 좋아해요.

-그럴 리가요.

-네?

-아, 아닙니다. 어제저녁에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일찍 닫혀있길래요. 아무튼 아쉽습니다.

-저희 꽃 좋아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게 닫으면 손님도 꽃 선물 말고 맛있는 거 사주세요. 애인분께요.

-아 애인 아닌데

-아니라고요? 매주 사 가시길래요. 행사 꽃도 아니었고...

-응원하는 사람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사장님 혹시... 아, 아닙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굴더니 입을 다물고 가버렸다.

어제 가게 본 사람은 계약을 하려나. 승준이도 그렇고 화연은 이래저래 머리가 아팠다.


며칠 후,

몇 번 전화를 안 받았더니 승준에게 메시지가 왔다.

딱 5번, 가볍게 썸 타는 것처럼 만나보고 결정하라고 했다.


[ 우리가 다시 전처럼 돌아가기엔 힘들 거 알아. 뭐라도 해봐야 너도 마음을 정하지 않겠어? ]


그렇다. 화연이 어떤 결정을 하든 둘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 문자에도 머리가 무거워 답장을 못 했는데 승준이 가게로 왔다. 고백을 받은 이후로 일주일 만에 처음 만났지만 특별히 어색하진 않았다.


-알겠어. 다섯 번은 매일이야?


화연도 이젠 결론을 내야 했다.


-왜 빨리 떼어내 버리게? 매주 토요일 어때~ 평일엔 저녁밖에 안 되니까. 새벽에 시장도 가니 일찍 자야 하잖아. 일정은 내가 짤게.


그렇게 첫 토요일. 승준이 정한 첫 번째 데이트는 유치하게도 놀이동산이었다. 영화나 보고 밥을 먹는 것보단, 많은 사람 틈에 있는 게 덜 어색할 것 같아 동의했다.

‘아니네...’

딱 붙어 롤러코스터를 타는데 오랜만이라 찌릿한 건지 승준의 딴딴한 팔이 피부에 닿아서인지 화연의 볼이 좀 뜨거워졌다. 더웠다. 여름이니 더운 게 자연스러웠다.

두 번째는, 도자기 체험을 예약했다가 비가 많이 와서 취소하고 최근에 생긴 쇼핑몰을 갔다. 승준이 추천한 메뉴는 인도 요리 전문점이었다. 면을 채소와 볶아낸 건 기름이 많이 들어간 잡채 같았고, 닭고기가 들어간 커리는 부드러워 싹싹 긁어먹었다.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이 한줄기씩 흐르는 걸 보며 화연은 마음이 차분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비가 그쳤다.


-서울과는 떨어져 있지만 여기 동네 분위기가 좋더라.


비 온 뒤 바람이 시원했다. 시원한 커피를 하나씩 들고 센트럴파크를 걸었다. 승준은 이곳에 종종 온다고 했다.


-너무 복잡하지도 않고, 과하게 정숙하지도 않은 이런 데서 살고 싶어. 결혼하면.


여기 32평 아파트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땅끝마을, 남쪽 바다로 가고 싶었던 화연은 야경이 근사한 공원을 걷다 보니 여기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는 흔한 데이트였다.

에어컨 바람 쌩쌩한 영화관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며 화연이 훌쩍거렸다. 그 옆에 승준은 팝콘을 먹다가 사레가 들려서 눈물을 닦았다. 어른 형이 운다고 초등학생이 엄마에게 얘기하는 소리에 화연은 울다가 웃음이 터졌다. 저녁으로 바에 앉아 스시와 생 아사히 맥주를 마셨다.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꽤 즐거웠다. 이도 저도 아닌 자신과 다르게 승준은 더 따듯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래, 같이 즐겨보자. 어쩌면 10년 친구와 마지막 여름일 수 있다.


네 번째는 여행을 제안했다.

패러글라이딩을 해보자며 단양 코스를 짜서 보여줬고, 방은 따로 잡는다고 했다. 잠시 망설였지만 오케이 했다.

전날 저녁에 만나 장을 보러 갔다. 고기와 음료, 과일과 시음한 화이트와인도 한 병 샀다. 오래된 연인은 이런 느낌이려나, 화연도 둘의 공기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어깨로 올라온 단단한 팔, 그 반쪽 품에 기대어 걷고 있었다. 승준은 약간 긴장한 듯 말이 없었다. 집에 가까워지며 화연이 몸을 빠져나왔다.


-내일 8시까지 데리러 올게.

-응. 조심히 가.


그는 잠시 서 있다가 화연을 살며시 안았다. 양팔을 허벅지 옆에 늘어뜨리고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려나, 설마 뭘 더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럼 어쩌지? 묘한 감정을 더듬고 있을 때 정적이 깨졌다.

띠리링.

가방 속 휴대폰이 작은 진동과 함께 소리를 냈다. 승준의 팔을 풀며 가방에 손을 넣었다.


[ 할 얘기가 있어, 내일 만날 수 있을까? ]


얼굴이 잠깐 떨렸다.


-이 시간에 무슨 문자야?


승준에겐 친구라고 둘러대고 내일 만나는 시간을 좀 늦췄다.

집에 들어와 따듯한 물로 샤워하고 찬물로 세수를 연거푸 했다.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펼쳤다.

‘왜...’

펜으로 종이를 누르다 세 손가락으로 이마를 받쳤다.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화연은 휴대폰의 네 글자를 풀지 못한 문제처럼 다시 힘주어 봤다.


[ 보고싶다 ]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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