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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시간

by 신선경






엉덩이를 딱 가린 청팬츠 위로 브이넥 민소매 차림의 20대 여성이 택시에서 내렸다. 귀밑까지 오는 흑발이 바람에 가볍게 날리다 금방 제자리로 열을 맞췄다.


-꽃은 뭐야? 나 주는 건 아닐 테고

-응. 이따 와이프 만나기로 해서

-선배는 여전하네


시간이 뜨던 참에 후배의 연락은 적절했다. 아내와 별거하는 한 달간 사람을 만나지 않았기에 입을 풀기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한 잔 마시면 소진과 약속 시간이랑도 딱이지 않나! 오늘은 선우에게 여러모로 운이 따르는 것 같아 신났지만, 일행에게 자랑할 상황은 아니었다.


-왜 헤어졌는데?

-다른 여자 좋아했어. 고등학교 동창.

-설마 양다리였어?

-그건 아닌데, 마음은 그랬겠지.


여자 눈의 초점이 잠시 흐려졌다가 푸른빛을 냈다.


-내가 오빠랑 결혼하면 더 이상 어쩔 거야, 나의 승리지! 근데 2년을 더 기다리래. 이게 무슨 뜻이겠어?

-딴맘 품고 있으면서 그동안 부모님 핑계 댄 거야? 몹쓸 자식이네.


둘은 입으로 판사봉을 들고 몇 번을 도로 위에 내리쳤다.


-나쁜 새끼... 그니까 술 사주라 선배! 안 그러면 혼자 한강에 잠수하러 갈 것 같아.

-그래! 마셔야지 당연히


딱 한 시간, 6시 반에 일어나자.

둘은 강남역 1층 호프집에 들어갔다. 실연한 후배에게 소개팅이라도 해줘야 하나 연락처를 뒤져보다가 사라진 시간을 눈치챘다.


[ 여보 미안해! 후배가 급하게 찾아와서 30분만 기다려줘 ]


마지막 주문 건 손님이 늦어서 소진이 도착한 시간도 7시에서 20분이 지나있었다. 선우는 10분 후면 도착할 거였다. 전화를 할까 하다가 디카페인 라떼를 주문했다.

이 카페도 오랜만이네. 연애시절 남자친구가 늘 여기에서 자신을 기다렸었다. 선우는 큰 키는 아니어도 늘씬하고 다리가 길어 정장이 참 잘 어울렸다. 얼굴도 쿨톤인데 숱 많은 흑발 덕에 어느 슈트를 입어도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 덕분에 소진은 연상처럼 안 보이려고 데이트 때마다 캐주얼한 차림에 운동화를 신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핑크색, 노란색 미니백을 들고 다녔었다. 누나로 보이면 어때. 어색함 때문에 거울 앞에서 한참 서성이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이제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8시.

선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사람이 한 번에 변할 수는 없다. 오늘은 남편과 기분 좋게 만나야 했다.


[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30분만 더 기다릴게 ]


연락은 잘하던 남편이라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무소식은 걱정할 필요 없다고 소진은 숨을 조용히 내뱉었다. 그리고 30분이 더 흘러 문자가 한 통 왔다.


[ S카드 승인 남*진

79,000 일시불

20:35 강남 비어킹 ]


소진은 산부인과를 다니며 좋아하는 맥주도 일부러 피했는데 이 순간 후회가 됐다. 카드 결제 알림이 이젠 참을 이유가 없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1층 | 맞춤 수제화


오늘은 예약 손님들이 많았다. 사장과 직원은 대화 없이 자신의 고객을 응대하고 있었다.

입사 면접을 볼 여성을 의자에 앉히며 유나는 오른쪽 무릎을 바닥에 붙였다. 검은색 5cm 굽의 펌프스 힐을 신기고 발 볼을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가죽 위로 팽팽하게 당겨지는 곳은 없는지 손가락으로 눌러보았다.


-사이즈 잘 맞네요. 처음엔 약간 답답한 듯 신어야 가죽이 늘어나서 헐겁지 않거든요~ 일어나서 걸어보시겠어요?


미끈한 바닥에서 타박타박 경쾌한 소리가 났다. 유나 키만 한 진열대 반대편에서는 중년 여성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두어 번쯤 들리고 있었다.


-아, 안 파니까 그냥 나가세요!


큰소리가 나더니 남자는 가게 밖으로 사라졌다. 손님을 그렇게 대하는 사장이 유나는 낯설었다. 그와 10년을 알고 지내며 화내는 목소리를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손님 그만 받고 가게 문 닫으라는 메시지가 왔지만, 해도 안 졌는데 그럴 순 없었다. 그 이후 한 차례 손님들이 몰렸다 쑥 빠져나갔다.


마감 2시간을 남긴 시간에 남자가 돌아왔다. 간판 불을 끄고 문을 잠근 후 카운터 안쪽 의자에 앉았다. 쇼윈도 조명도 꺼졌다.

홍차빛 얼굴은 그늘진 나무처럼 쓸쓸해 보였다. 그는 말없이 정산 노트를 펼치고 포스를 마감했고 유나는 어긋난 신발들을 정리했다. 남자가 매장 안의 불까지 끄자 가게 밖으로 어두웠던 도시가 선명해졌다. 둘의 거리는 2미터쯤 될까. 어색하지 않지만 답답한 그 정도였다.


-...살려주라


남자의 시선은 카운터 끝을 향한 채 속삭였다.


-당신아, 나 좀 살려주면 안 되겠니...


사방 벽으로 퍼진 그의 말이 유나의 가슴으로 모아졌다. 한 뼘도 안 될 진동에 어깨가 떨렸다.


-갈게. 내일 봐.


서둘러 짐을 챙겨 나왔다. 혹시라도 따라나설까 건물 뒤로 뛰어 숨었다.

바람에 눈이 시렸다. 전화가 울렸지만 절대 받지 않아야 했다. 목소리를 들으면 그가 하자는 대로 할 것만 같았다.


밤공기가 찼다. 6월이 무척이나 서늘했다.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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