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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이는 맥주캔

by 신선경





소진이 집을 나간 건 3주 전이다.


**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선우는 7시쯤 걸려 온 전 직장 후배의 연락을 거절할 수 없었지만 소진이 싫어하는 술은 참았다. 밤새워 공부할 생각에 옛날 통닭을 한 마리 사 들고 천천히 비밀번호를 눌렀다. 불 꺼진 거실 벽에 익숙한 실루엣이 비췄다.


-안 잤어?


선우는 아내를 힐끔 보고는 치킨 봉지를 방 안에 밀어 넣고 문을 당겼다.


-그 대학 후배 알지? 걔가 일이 안 되니까 속상해서 잔뜩 취하더라고. 집에 달래서 보내느라 좀 늦었네. 잘까 봐 연락 안 했지.

-21만 원 긁혔던데

-예전 회사 앞에 식당, 아! 여보도 몇 번 가봤잖아. 나는 술 안 마셨어. 동생들이라 내가 사야지.


선우는 늘 그랬다. 동생이고 후배니까 당연히 사줘야 했고 택시비까지 챙겨줘야 속이 편했다. 연애 때는 그런 자상함을 소진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나. 백수 남편이 일주일에 4번은 치킨과 맥주를 사 먹고 오늘처럼 누구를 만나면 소진이 준 카드를 잘도 쓰고 왔다.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지만 남편이 호구가 아닐까 불편했다.


-저번엔 형이었잖아.

-아! 민식이 형은 결혼하신다니까 내가 사야지. 신혼집도 월세라는데... 그래도 그 형보단 내가 낫잖아.


도대체 뭐가 낫다는 건지. 그녀는 배꼽 위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애써 삼키고 있었는데 결국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거 미련한 행동이야. 다 네가 만만하니까 이용하는 거라고


한 살 어린 남편에게 가끔 '너'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말이 좀 그러네 여보.


큰소리 내는 법 없는 선우의 음성이 약간 건조해졌다.


-내일 병원 가기로 한 날인 거 잊었어? 이런 때 가장 예민한 거 아는 사람이... 이해가 안 되네. 왜 이렇게 신경 쓰이게 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는데 되려 자존심이 상했다. 혼자만 안달하는 것 같았고 서른한 살의 나이도 서러워졌다. 소진은 남편이 곁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다. 그의 다정함이 남이 아닌 자신에게 향하길 바랄 뿐이었다.


-당분간 엄마네서 있을게.


드레스룸으로 들어간 소진은 손에 잡히는 대로 옷 몇 벌을 집어 쇼핑백에 넣고 핸드백에 차 키를 던졌다.


-병원은 다음에 가자.


철컥.


문이 닫히며 집이 흔들리는 것 같은 진동이 선우에게 느껴졌다. 현관 조명이 스스로 꺼졌고 거실 스탠드 조명은 회색 실루엣을 마루에 그렸다.


연기를 전공한 그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했었다. 주연을 심심치 않게 하며 재능을 보였지만, 동기들이 하나둘 떠나자 흥미를 잃었다. 마침 군대 후임의 소개로 보험영업을 시작했고 100여 명 조직의 지점장까지 올랐다. 수입이 적지 않았으나 여자친구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하길 바랐다. 늦은 퇴근과 잦은 지방 일정 등 안정감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일을 그만두면 결혼하겠다는 그녀에게 늦지 않게 답을 했었다.


선우는 자신과 달리 맺고 끊음이 똑 부러진 여자친구에게 매력을 느꼈다. 냉장고에 반찬을 채워두고 양말도 짝을 맞춰 서랍장에 가지런히 넣어두고 갔다. 주말에 퇴근하고 집에 가면 욕실 수건도 색상별로 각이 맞춰져 있었다. 경험한 적 없는 누나 같고 엄마보다 더 엄마 같은 그녀였다.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에서 처음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음을 느낀 그는 소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걱정과 달리 자격증 공부는 재밌었지만 양이 많은 건 따분했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 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소진은 어머니와 중고 명품샵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산과 사망보험금으로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부동산 사장이 예약된 거라고 선우 친구들은 호들갑을 떨었지만, 조직을 운영하며 영업할 때처럼 신나진 않았다.


보통 여자라면 싸우고 남편보고 나가라고 했을지 모르겠다. 집 없고 돈 없는 자신을 배려해 준 것을 선우도 모를 리 없었다.


빈 맥주캔이 수북했다. 오랜만에 혼자 있는 편안함에 오래 취해 있었다.


[ 조금 일찍 끝낼 수 있어? 같이 저녁 먹자.

어머님 댁으로 데리러 갈게. 짐도 챙겨서 나와 ]


소진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선우는 이빨을 따닥따닥 부딪치며 샤워기 호수를 틀었다.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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