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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시작

by 신선경






2층 | 중고 명품


-원하는 대로 살자니, 소진아. 설마 헤어지자는 거야?


선우도 두 글자를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당신 진심 아닌 거 알아. 앞으론 내가 조심할게.

-어떻게 조심할 건데? 술 끊을 거야? 사람들 절대 안 만날 거야?

-......

-휴대폰 번호부터 바꿔. 그럼 믿을게.


입을 열지 않는 남편 대신 소진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홧김에 하는 말 아니야.

앞으로 아이도 가져야 하고, 불안한 상태로 미래를 계획할 순 없잖아. 진지하게 고민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당신한테 바라는 건 하나야. 가족이 우선이었으면 좋겠는 거.


그녀는 목소리 톤을 높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선우는 휴대폰을 새로 구입한 후 저녁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번호 바꾸고 연락처 싹 삭제하지 않으면 오지 마. 이대로 정리하는 걸로 알게.


소진이 먼저 일어나 진열장으로 몸을 돌렸다. 그와 같이 살면서 불안한 것보단 혼자인 것이 나을 것 같았다.

10초 후쯤 터벅터벅 느린 발소리가 멀어졌다. 문밖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소진의 왼쪽 가슴에 찬 이슬이 맺혔다.

그를 닮아 풍성한 머리카락, 뽀얀 볼을 부풀리며 눈 맞추는 아이.

한 가족을 비추던 햇살이 구름 뒤로 숨어버렸다. 바람조차 숨죽인 하늘이 소진을 덮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심장을 누르며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모텔 휴게실에서 밤을 새운 선우는 씻기 위해 집으로 갔다.

한숨 자고 일어나 그대로 밖으로 나와 건너편에 보이는 전자제품 매장으로 들어갔다.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하고 새 휴대폰을 받았다. 직원이 옮겨 준 전화번호부에서 익숙한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형, 이거 구속이고 집착 아니야? 그냥 헤어져라! 어떻게 사냐 답답해서. 이혼해도 집은 하나 해주겠지.

-이 미친 자식은 왜 따라와서 헛소리냐. 닭! 이나 뜯어라.


선우의 선배는 큼직한 퍽퍽 살 하나를 포크로 찍어 막내 후배 입을 막았다.


-선우야. 제수씨가 원하는 대로 우선해. 나 이혼하고 힘들었던 거 알지? 다 필요 없어. 나도 얘도 평생 네 옆에 있단 장담 못 해. 와이프 말 따르는 게 맞는 거 너도 알잖아.

-알지. 형. 근데 아예 끊으라는 건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한 달에 두 번 정도로 얘기해 보려고.

-안 될 것 같은데. 선우야, 형 말 들어라. 나 다시 와이프랑 아이랑 지내면서 요즘 참 좋다. 캠핑카도 중고로 하나 샀어. 너도 이젠 가정에 더 집중해야지.

-아, 나는 여자친구랑도 헤어지고 돈도 없고 형들 부럽구만요. 나도 소개 좀 해줘!!


선우는 아내의 단호한 모습을 보고도 결심이 서지 않았다.

철없는 후배보단 존경하는 형의 말을 듣는 것이 현명하겠지만, 그래도 살아가는데 사람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자격증 취득하고 부동산 개업을 해도 처음엔 소개와 인맥 아닌가. 전화번호부 718명. 그동안 어떻게 지켜온 건데...


-선우야. 그럼 형이랑 인맥 테스트 한번 해볼래?

-엇 뭐야 뭐야 형! 나도 재밌는 거 끼워줘요!!

-인맥 테스트?

-나도 할래요. 나도!


선우는 일행이 적어준 대로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지인 10명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 OO야. 미안한데 내가 좀 급해서 100만 원만 빌려줘. 전화 부탁해. ]


-형. 이거 액수가... 천만 원으로 올려야 되지 않아? 동시에 전화 오겠는데.


돈을 빌려줘 본 경험은 있지만 융통을 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선우는 쪼잔해 보이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지만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결과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 있게 5백만 원으로 올려 메시지를 보냈다.







동민은 자신이 뱉은 말에 놀랐다. 약간 취기가 오른 탓, 음악 탓이라고 생각했다.


-통영은 당일로 다녀오기엔 너무 멀고... 내일 뭐 해?

-내일은 출근하지. 로드샵은 주말이 더 바쁘니까.

-아, 그렇겠네. 나도 구두 하나 새로 맞춰야 하는데. 혹시 가게가 어디야?


동민이는 어느새 유나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1층 | 맞춤 수제화


-어제 뭐 했어?

-소개팅.

-청담 원장님한테?

-응.

-그래서?

-별로였어.

-거봐.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웃었다.


-오빠. 소개팅은 실패한 거 맞는데 다른 남자 만날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유나는 대답할 생각도 없었지만 때마침 그가 가게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우리 학교 선배시라면서요? 우리 유나 잘 부탁드립니다!


동민이는 넉살 좋게 굴며 사장에게 아이스커피를 내밀었다.


-아, 반가워요. 잘 마실게요.


남자는 미소로 인사를 건네고 유나를 쳐다봤지만, 유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뭘 이런 걸 사 왔어. 와준 것도 고마운데.

-혹시 아침밥 안 먹었을 것 같아서, 라떼로 사 왔는데 괜찮아?

-어머 야, 나 라떼 좋아해. 역시 센스 있어.

-하하 다행이다.


남자는 손님의 발사이즈를 재면서도 귀는 다른 곳에 두었다. 구두를 고르는데 필요하지 않은 그들의 대화가 무척 거슬렸다. 사장이 두 명의 손님을 보냈을 때, 유나의 손님도 결정이 끝났다.


-주문한 건 2주 정도 걸릴 거야. 지금 신고 있는 거 헐거워 보여. 깔창 좀 챙겨줄게. 잠시만.


유나가 가게 뒤 창고로 들어갔다.


-근데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제가 앞으로 자주 뵐 것 같아서요. 신발도 편하고 다른 이유도 있고요.


그는 사장 앞에서 소리 내 웃었다.


-그럼 물론이죠! 이렇게 단골이 되어주실 고객님이신데요. 혹시 오늘 저녁에 뭐 하세요? 제가 저녁 살게요. 후배님.


남자는 셋의 자리를 만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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