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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선경






[ OO야, 미안한데 내가 좀 급해서 500만 원만 빌려줘. 전화 부탁해. ]


셋은 소주잔을 부딪치며 한 사람의 휴대폰을 주시했다.


-나는 10만 원으로 보냈어, 형!!

-형. 재미 삼아 하는 거지만 영 찝찝하네. 지금이라도 잘못 보냈다고 문자 돌릴까 봐.

-선우야. 살다 보면 이보다 더한 일도 생길 수 있어. 그럴 때마다 사람이 갈리더라. 네가 힘없이 누워있을 때 들여다봐 줄 사람이 누구일 것 같니?


선우의 머릿속에 몇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학로 극단에서 함께 활동하던 동료 형. 한 명이 배역을 못 땄을 때면 닭다리 과자에 맥주 한 캔을 나눠마시며 좋은 날을 외쳤었다. 이후 흥미를 잃은 선우는 배우를 관두고 영업직에서 자리를 잡았다. 동료는 그 이후로도 몇 년을 더 남아있었다. 비중 있는 역할을 맡고 공연이 성공을 거둬도 그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선우의 동료도 결혼을 앞두고 친척 회사에 입사했다. 신혼살림을 월세로 시작한 그에게 선우가 최신형 냉장고를 보냈었다. ‘선우야. 축의금도 그렇게 줘 놓고... 형이 돼서 매번 신세만 진다. 앞으로 너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내가 빚이라도 낼 거야. 난 이제 유 씨다!’ 울먹이던 그의 목소리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15년 지기의 부모님이 집 장만할 때는 에어컨을 보냈다. ‘인마. 네 덕에 효도하고 산다. 엄마 아까 우시더라. 진짜 고맙다, 선우야.’

회사 팀원들이 실적이 없어 생활고로 힘들어하면 슬며시 용돈을 쥐여주던 건 셀 수도 없었다.

5분이 지났고 전화기는 조용했다. 선우는 메시지 전송이 안 됐나 싶어서 다시 확인해 봤지만, 오류는 없었다.


-아하. 저녁들 먹을 시간이네.

-뭔 소리야. 9시면 누워서 휴대폰 볼 시간이지. 오! 10만 원 보내준대!!


선우는 하루 종일 굶었지만 노랗게 튀겨진 치킨에는 손도 안 댔다. 소주잔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할 때 옆에 있는 후배가 덩달아 문자를 보내더니 먼저 답장을 받았다.

그때 선우의 전화벨이 울렸다.


-형! 아, 그런 건 아니고. 갑자기 좀 쓸 데가 생겨서. 와이프는 잘 있지. 혹시 100만 원이라도 빌려줄래? 아, 집 샀구나. 축하해! 대출이자 엄청나지... 그래. 형도 어려운데 미안해. 집들이할 때 연락해. 내가 티브이라도 하나 사줘야지! 아니야, 괜찮아. 다음에 봐.


이어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 선우형. 미안해. 와이프한테 용돈 받아 쓰는 거 알잖아... 조만간 소주 한잔해! ]


-형! 뭐래? 빌려준대?!!

후배가 선우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아내하고 용돈 얘기 나오면 말 다 했네. 그래서 매번 형한테 술 얻어먹었나 보다.

-별로 만나지도 않았어. 친한 친구는 아직 문자 못 본 것 같아.


생맥주 세 잔과 한치가 테이블에 올려졌다.


-선우야. 이거 다 마실 때까지만 기다려 보고 이만 일어나자.

-그래, 형! 나 졸려.


일행은 정확히 30분 후 집으로 돌아갔다. 선우는 15년 지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우 씨,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지금 그이가 씻고 있어서요. 아, 지금 나왔어요. 잠시만요.


전화기 너머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선우 씨 전화예요.”

“당신은 왜 남의 전화를 받아.”


-흠흠. 응. 선우야.

-이제 들어왔어?

-어. 오늘 야근이 길었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혹시 문자 못 봤어?

-아 맞다. 봤는데 아까 운전하고 있어서.

-그래. 부탁 좀 할게. 다음 주면 바로 줄 수 있어.

-무슨 일 있는 거야?

-갑자기 쓸 데가 좀 있어서. 금방 줄게.

-미안해서 어쩌냐. 조금 일찍 얘기했으면 바로 보냈을 텐데. 어제 친형이 급하게 좀 빌려달라고 해서.


선우는 예전 같았으면 이쯤에서 멈췄다. 보험영업을 할 때도 지인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게 굴어야 할 것 같았다.


-너 다음 달에 차 산다고 적금 모아둔 거 있잖아. 우선 200만 원만 보내줄래?

-내가 말 안 했나? 차 그거 물 건너갔다. 부모님 집 리모델링해야 해서 있는 돈 싹 보내드렸잖아. 그래서 지금 딱 거지다, 야.

-새집을 왜? 2년 전에 아파트 사셔서 내가 에어컨 사드렸잖아.

-아...! 그게 좀 사정이 있어. 요즘 공사가 문제가 많다! 근데 집에 무슨 일 있냐? 처갓집이 건물주인데 돈 얘기를 하고.

-나 이혼할 것 같아.

-야야. 웬만하면 그냥 빌고 살아!! 너 그렇게 백수로 놀고먹는 거 다 네 마누라 덕 아니냐. 당장 용서 구하고 들어가. 그리고 화해하면 잘 얘기해서 친구 차 좀 바꿔줘라! 날도 더운데 차 에어컨이 시원찮아서 죽겠다.

-내가 왜 니 차를 바꿔주냐?

-친구 농에 뭘 또 그렇게 정 없이 구냐!


짧은 통화가 끝나고 빈 맥주잔에 소주를 부었다. 휴대폰에 초록색 불빛이 깜박였다.


[ 선우야, 집에 잘 들어갔니? 형이 괜한 일을 벌였나 싶어서 심란하다. 너를 아끼지만... 널 가장 생각하는 건 제수씨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잘 자고 내일 통화하자. ]


선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친구라고 생각한 건 자신뿐이었나. 전체 문자를 보내려다 관두기로 했다. 몇 시간 전의 여유는 알코올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오랫동안 자신 안에 있던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선우는 쓴 물을 들이켰으나 그 어떤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딩' 그룹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선배' 그룹을 삭제하시겠습니까?

'후배' 그룹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베스트' 그룹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내꺼 찐♡'을 삭제하시겠습니까?


그녀의 웃음은 선우의 삶을 밝혀주던 빛이었다. 한없이 어두워진 지금, 소진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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