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일에 브런치북이 선택되지 않고 발행되어 새로 발행하였습니다.
왜 자꾸 오는지 | 화연
만날 수 없는 거리
이제 잊어야 하는데
잊었다 생각했는데
자꾸 꿈에 나타나
내가 꾸는 것이 아니야
당신이 나타나는 거야
만날 수 없는 우리
이제 잊을 거야
정말 잊어버릴 거야
그러니 그만 나타나
꿈에 그만 와
생각에 들어오지 마
.
.
나는 못 잊고 있나 봐
나는 못 잊을 건가 봐
꿈에서 깨기 싫은 걸 보니
오늘도 네가 왔으면 싶은가 봐
별이 뜬 밤,
꿈꾸는 내게 와줄래
빗소리가 매서운 7월의 저녁.
불도 안 켜진 방에서 한 남자가 모니터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타자기 소리가 멈추자 실시간 댓글이 떠오른다.
-뭐 이리들 날이 선 거야? 휴. 이 땅에 순정은 희망이 없구만.
얼마나 몰두했는지 누가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제 친구 좀 살려주세요' ? 지금 한가롭게 이런 거나 볼 때야!! 빨리 나와 봐 건조기가 또 안 돼.
-응. 나 통화만 잠깐.
-빨리빨리!! 빨래에서 냄새난단 말이야!
여자는 천둥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방을 나갔다.
-이 녀석은 밥이나 먹었나... 전화도 안 받고 뭐 하는 거야.
[ 혁아~ 왜 또 전화는 안 받냐. 내일은 형이랑 점심 먹자~ ]
남자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PC 전원을 껐다.
창문으로 비치는 옅은 조명은 방 안에 푸른 물망초를 더 여리게 했다.
짧은 우기가 끝났지만 여름은 뜨거웠다.
1층 | 화 (꽃)
화병들이 네 쌍의 손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기사님 이게 마지막입니다. 애쓰셨습니다.
회색 티셔츠가 진하게 얼룩졌지만 그의 얼굴엔 그늘이 없었다.
-화연아, 이건 다 기부한댔지?
-응. 생각보다 꽤 많네. 너 아니었으면 나 혼자 큰일 날 뻔했다.
-그렇다니까. 짐이 없어 보여도 이사는 그렇지가 않아요.
-그러게. 내가 경험이 없잖아. 하하. 고마워. 내일까지 좀 부탁해.
-응, 멀지도 않은데 뭐.
-내가 같이 가야 하는데 미안해서 그러지.
-집 계약 때문인데 뭐.
-정말 고마워~ 시간 변경하려고 했는데 안 됐지, 뭐야.
-남자친구한테 너- 무 그렇게 고맙다고 말하면 서운해.
-그런가? 하하.
-그보다 집은 정말 안 구해도 되는 거야?
-응. 괜찮아. 잠시는 그러고 싶어.
-이미 얘기한 거니 더 이상 말리지는 못하지만 걱정되니까...
그녀는 승준에게 눈꼬리를 내리며 웃어주었다.
-여자친구 혼자 그렇게 떠돌게 두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이래보겠어. 우리는 자주 볼 건데 뭐.
-그래! 땅끝도 아니고. 우리 약속했으니까.
승준도 애써 담담한 척 미소를 보였다. 품에만 안아둘 수 있는 여자가 아님을 알지만 아직은 불안했다. 얼마 전 가게가 나감과 동시에 화연은 집도 내놨다. 다음 날 바로 가 계약금이 입금됐고 내일이면 매도 계약을 한다. 그녀는 이사할 곳은 정하지 않은 채 짐만 업체에 맡기고 여행을 하겠다고 했다. 새롭게 지낼 곳을 정하기 위한 여행이라며.
승준은 여행도, 거처도 자신의 집에서 1시간 이상은 안 된다고 조건을 붙였다. 화연은 동의했다.
그녀가 땅끝마을로 가려던 건 과고를 잊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곁에 남자친구도 있고 굳이 멀리 도망칠 필요가 없었다. 다만 화연은 바다를 가까이 보고 싶었다. 그간 답답했던 마음을 다독이며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 바닷가 근처에 거처를 마련하고 싶었다. 제주도는 승준이 말도 못 꺼내게 했고, 서울에서 1시간 거리라면 인천의 서쪽 바다 또는 남한강 쪽이 최선이었다. 화연은 우선 동해 쪽을 짧게 여행하며 통영도 들릴 생각이었다. 먼 곳을 갈 때는 주말에 승준이와 함께하기로 했지만 가끔은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 참, 승준아 새롭게 소설을 시작했어. 1년을 목표로 준비해 보려고, 바닷가 근처에 집 구하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도 할까 해. 이야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며칠 전에 같이 읽은 편의점이나 서점 소설들처럼?
-응, 맞아. 근데 편의점은 좀 정신없고 서점은 시간이 길더라고. 동네에 작은 가게가 좋겠어.
-나중에 화연이 네가 해도 좋겠다! 주말엔 내가 알바하고.
-그래. 그러면 좋겠다.
화연은 그런 계획도 하고 있었다. 글로만 먹고살 수는 없을 테니까.
-아. 기사님 잠시만요.
화연은 차에 실린 화병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제가 가져갈게요.
작년 6월에 오픈했던 꽃집 '화'는 1년 2개월 만에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