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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 Chun Sep 05. 2020

코로나 시대 아내의 비즈니스들..

공감과 선택

코로나 19로 인해 변화된 가족의 일상 중 하나는 매달 한 번씩 찾았던 이발소가 바뀐 것이다. 아내가 한동안 유튜브를 열심히 보다가 아마존에서 이발기구를 구입하고 코로나 이발소를 개업한 것이다. 손님은 나와 아들 둘, 모두 3명이 전부이지만 그래도 성업 중이다.


초보 이발사에게 처음 머리를 맡기는 것은 약간의 긴장감마저도 들었지만 외부 활동도 없고, 외출한다 해도 마스크를 끼고 나갈 텐데 "조금 어색하면 어떠랴" 하는 위안을 가지고 코로나 이발소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머리스타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까다로웠던 아들들도 재택근무 중이라 나와 같은 이유에서 체념한 듯 순순히 아내의 고객이 되었다. 


코로나 이발소는 이전에 누려보지 못한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일단 이발기술이 뒷받침되는지에 대한 여부를 떠나서 디테일하고 상세한 부분까지도 주문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원하는 모양이 나올 때까지 이것저것을 모두 지적질할 수 있고, 그때마다 아내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고객을 응대한다. 물론 이발료도 받지 않으면서 말이다. 


처음 이용한 코로나 이발소의 결과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아이들도 만족해한다. 나는 굳이 안내도 되는 팁까지 냈다.

아내의 이발 기술은 코로나가 점차 장기화되어가는 상황에 따라서 보다 더 향상되는 것 같아 보였고, 아내는 향상된 기술에 비례해서 머리를 자르는 것이 훨씬 더 과감해져 갔다. 


하지만 3번째로 코로나 이발소를 이용했을 때는 먼저 이용한 손님에 비해 내 뒷머리를 너무 짧게 자른 듯했다. 앞머리와 뭔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다. 아내는 보기에 나쁘지 않다고 고객을 설득하려 하지만 뭔가 어색해 보이는 게 확실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내는 뒷머리와 옆머리 자르는 것은 어느 정도 숙달되었는데, 앞머리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술은 아직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아내의 이발기술은 오늘도 진화하는 중이고 코로나 이발소 비즈니스는 창업에 성공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만일 코로나가 끝나도 계속해서 여기를 이용하게 되면 어쩌지?

이런 상황은 우리 집 만의 일은 아닐진대, 많은 이발소에 근무하시는 분들이 생계에 영향을 받지는 않을는지...


사실, 아내가 이발소를 개업하기 전에 먼저 창업한 것이 있다. 재봉기를 가지고 가끔씩 운영하던 단순 봉제 공장이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지고 마스크 대란으로 하루 종일 뉴스에서 시끄러울 적에, 간헐적으로 생산하던 인형 옷 대신 마스크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시기적절하게 가치 있는 비즈니스로 전환했다고 생각했다.


한가했던 아내의 공장은 모처럼 활기차게 가동되기 시작했고 대량 생산을 위한 준비에 분주했다. 코로나 초기부터  미국에서는 마스크를 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마스크에 대한 절실함은 너무도 컸다


아내의 현명한 선택이 우리 가족을 마스크 대란에서 구해준 셈이다. 미국에서 마스크는 구할 수 없었지만,  Joann이라는 곳에서 비말 차단용 마스크 재료를 구입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아내의 비즈니스는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초기 생산한 마스크는 끈이 다소 짧기도 했고 착용에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계속된 기술개발로 고급화하는 데 성공했다. 얼굴에 완벽하게 부착되고 숨 쉬는 것도 불편하지 않는 혁신적인 진화를 거듭했다. 역시 고객은 3명이지만 외부 운동, 산책을 하러 가거나 쇼핑을 갈 때 없어서 안 될 가장 중요한 생필품으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디자인과 성능이 여느 판매용 마스크에 뒤지지 않아 마스크 비즈니스는 이발소 보다도 훨씬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아내의 비즈니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작은 이발소였지만 요즘은 빵집도 개업했다.  

미국에서 코로나가 막 확산기로에 있을 때 대부분 마켓에서 빵과 음료를 구하는 것이 힘들 때가 있었다. 


미국의 코로나 사태는 지금도 심각하지만 초기에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비상식량과 식료품, 생필품 들을 구하려는 인파가 마트 주차장을 가득 메웠고, 이런 신기한 광경은 매일 유튜브에 올라오는 단골 메뉴기도 했다. 실시간으로 미국 각 주의 상황들이 공유되는 현실들은 지구의 멸망이라도 앞둔 것처럼 혼란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 행렬 속에서 우리도 비상식량을 구하러 다녔던 몇 달 전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아내는 빵을 사 나르기보다는 빵 재료를 구해다가 직접 빵을 만드는 비즈니스를 시작했는데 이 빵집은 오늘도 성업 중이다. 고객은 3명에 지나지 않지만 아침 빵집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아내의 사업체는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토마토, 깻잎, 오이, 고추 등 식료품 생산을 위한 영농법인회사(?)를 뒷마당에 시작했다.  사실, 이 비즈니스는 창업한 지가 꽤 오래되어 딱히 이번 코로나에 관련한 창업으로는 볼 수 없지만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데 그 어느 때보다 효용적 가치가 높은 듯하다.


코로나 19를 처음 접하고 미국에서 거주하는 많은 사람들은 몹시 당황했을 것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문화 속에서 혼자 마스크를 쓰고 마트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도 불편했다.

마스크를 쓴 사람은 환자 취급을 받거나 심지어는 인종차별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니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도 눈치를 보기 일쑤였다. 이제 백신이 곧 보급될 것으로 보여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예전의 삶을 되찾을 거라는 보장이 우리에게는 아직 없다.


퇴근 후 지인들과 함께했던 포장마차가 그립고, 개봉될 영화에 마음 설레던 그 시절이 너무도 그립다.


 급변하는 모든 변화가 어리둥절하고 신기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된 상황에 나도 모르는 사이 적응해가고 있는 일상들을 뒤돌아 본다.


더불어 아내가 거느린 많은 사업체들 덕에 우리 가족은 코로나 시대에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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