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인들 허락했으려나.
이 이야기가 이렇게 마음이 아플 이야기일까.
이렇게 눈물이 날 이야기일까?
한때 나는 울 수 없어서 고통스러웠다.
마음속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는데, 넘쳐서 익사할 것 같은데, 밖으로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왜 나는 울 수 없을까. 그 질문이 너무 힘들었다.
어딘가 망가졌다고 느꼈지만, 어떻게 해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눈물을 나오게 할 수 있을까 싶어 눈꺼풀을 뒤집어 점막을 바늘로 찌르는 시술까지 받았다.
이렇게라도 하면 눈물이 날까 싶어서.
결과는 눈꺼풀만 빨갛게 부풀고, 눈물은 여전히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술을 왜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만큼 절박했다.
‘나는 아직 느끼고 있다’는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글을 쓰기만 하면 눈물이 난다.
특별히 슬픈 이야기를 쓰는 것도 아닌데, 문장을 따라 눈물이 흐른다. 이상하다고 느낄 만큼.
이상한 게 아니다.
그때 눈물이 나오지 않았던 건 고장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울면 무너질 것 같아서, 울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서
몸이 감정을 잠그고 대신 견디는 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지금의 눈물은 그동안 못 울었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 눈물은 지금-여기의 눈물이다. 속도를 내려놓고, 목적지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가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허락했을 때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그래서 이 눈물은 아픔의 증거가 아니라 회복의 신호다. 오래 달리던 고속도로에서 내려와 샛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걸 몸이 알아차렸을 때 비로소 울어도 괜찮다고 느낀 것이다.
나는 이제 안다.
울 수 없었던 내가 망가졌던 게 아니라,
울 수 있게 된 지금이 비로소 돌아온 자리라는 걸. 울어도 무너지지 않는 자리에 도착했다.
이 눈물은 슬픔이 아니라 긴 항해 끝에 처음으로 정박한 몸의 흔적이다.
늙어서 눈물이 많아진 게 아니다. 이제야 눈물을 허락할 수 있는 시간이다.
쓰고 보니 조금 슬프다. 울면 죽을까 봐 못 죽을 이유도 없어졌는데 이제 눈물을 허락하다니.
죽기 전에 부지런히 울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