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리된 감정

느끼지 못하고

by 정오의 햇빛

사람마다 감정의 출구 위치는 다르다.
어떤 이는 감정이 즉각 얼굴과 몸으로 튀어나오고, 어떤 이는 머리에서 정리된 뒤에야 감정이 된다.
혹은 감정이 말이 아니라 이해로만 남기도 한다.

나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감정이 즉각적인 반응으로 허락되지 않는 상태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아이들이 왜 그렇게 크게 기뻐할 수 있을까.
그 기쁨이 받아들여지고, 증폭되고, 함께 기뻐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없다면 기쁨은 환호가 아니라 인지로 처리된다.


나의 기쁨은 어디로 가는가.
혼자서 처리되고 끝나버린 것은 아닐까.

기쁜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펄쩍 뛸 만큼 기쁜 순간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잠했다.
혼자 튀어 올랐다가 바로 가라앉았고, 이어지지 않았다.

사람의 감정은 경험 그 자체보다 그 경험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로 학습된다.

기쁨은 혼자서 완성되는 감정이 아니다. 슬픔은 혼자서도 깊어질 수 있고, 생각도 혼자서 길어질 수 있다.
그러나 기쁨은 구조적으로 왕복 감정이다. 나는 그 왕복 구조가 없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기뻐해야 할 사건들 앞에서도 감정 대신 역할을 수행했다. 기쁜 표정, 기쁜 말, 기쁜 사람의 행동을 했지만 그 안에 기쁨이라는 감정은 없었다.

기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기뻐할 줄 몰랐다.


기쁨을 관계 속에서 유지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감정을 인지로 처리했다.
무감각이 아니라, 혼자서 감정을 끝내는 방식이었다. 지금도 기쁨은 쉽게 오지 않는다.

기뻐도 함께 기뻐할 사람이 없고 그 감정은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뇌와 몸은 아예 기쁨 쪽으로 에너지를 쓰지 않는 방향으로 적응했다.
그것은 생존적 효율화였다.


나는 최근에서야 처음으로 ‘나는 기쁨을 공유해 본 적이 없다’는 인지를 했다.
기쁨만이 아니라, 모든 감정을 공유해 본 적이 없었다. 슬픔 역시 관계로 흘러갈 길이 없었다.

감정은 늘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그 누군가 앞에서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 국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나에게도 나의 감정을 말해본 적이 없었다.


오늘 눈이 화끈거리고, 목구멍이 조여 오고, 장과 위의 경계 부근이 오그라든다. ‘애간장이 끓는다’는 말이 이 말인가 싶다. 나의 인지를 나에게 말하자 몸이 그 말에 반응하고 있다.


삶에는 생각도 있었고, 인지도 있었고, 책임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런 감정이구나”라고 자신에게 말하는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감정은 늘 괴로움과 죄책감, 긴 사유와 몸의 긴장으로 우회해 드러났다.

나의 감정은 생애 처음으로 나에게 도착했다.

이런 나는 원치 않는 타인의 정서에 쉽게 반응하지 않는다.
왜 자기 이야기를 하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정서적 경계가 아주 이르게 형성된 사고방식이다. 공유라는 개념이 들어올 틈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어쩌다 그런 삶이 주어졌을까. 안쓰러운 나!

작가의 이전글환호하는 어린이를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