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포춘 2

by 정오의 햇빛

굿 포츈에 나오는 세 남자의 모습은 나의 자화상이다.

일생을 내가 하는 일을 가치 없게 느끼며 살았고, 너무나 작은 날개로 이미 비대해진 나와

양 품에 안긴 두 아이를 안고 날아오를 수 없는 삶을 그래도 날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썼던

키위새 같던 나의 모습이 키아누 리브스의 작은 날개 안에 있다.


돈이 없어서 죽겠다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죽어야겠다고 마음먹는

영민하고 교육받은 남자. 팁으로 받은 돈으로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마지막 식사를 하고 죽으려 했던

인도 청년의 모습은 나다.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사람을 부리며 삶을 향유하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는 방향 없는 부자의 모습도 역시 나다.

어느 한 장면도 내가 아니었던 순간은 없다.


무심히 보았던, 심심한 이야기로 소비되었던 가벼운 코미디 영화 〈굿 포츈〉은 본 지 17일 만에 돌아와 문을 두드렸고, 그 문을 연 순간 그때는 보지 못했던 모든 장면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가난한 인도 청년이었던 나는 작은 날개의 천사가 되면서 지워졌고, 부유한 남자가 되면서

자기 삶의 의미를 폄하하던 천사 또한 밀려났다.


그 모든 모습이 나였는데 모습이 바뀌고 시간이 바뀔 때마다 이전의 존재들은 하나같이 지워지고

사라지고 멀어졌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순간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오직 현재의 나만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유아시절 가족들에 의해 지워졌던 경험에 연연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니 정말 슬픈 것은 가족들이 지웠던 내가 아니라 내가 지워버린 과거의 나였다.

그 모습들은 혐오하거나 미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그 모든 모습을 지금의 삶과 함께 데리고 가며 지난 시간 속의 나를 인정하고 존중했어야 했다.

삶에서 만나는 과거의 나와 닮은 타인들에게 연민을 보내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을

살았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과거의 나를 지워버린 채 현실에서 만나는 과거의 나와 같은 사람들을 멀리했다.

어쩌면 혐오했고, 경멸했을지도 모른다. 지워버린 나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게 힘들어서.

그것은 타인에 대한 연민 없음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 자기혐오였고 자기 경멸이었다.


나는 나에 대한 가족들과 타인의 시선만을 불쾌해했을 뿐, 나에 대한 나의 시선을 자각하지 못했다.

너무 멀리 밀어두었기 때문에.

정말 잘못한 것은 내가 나를 나에게서 분리했던 일이었다.


그 영화의 내용이 기억 속에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며 나는 그저 오락영화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의미가 크지 않아서, 인상이 강렬하지 않아서, 오락코미디 영화니까 보았다는 그 정도로만 남아도 되는 영화라고.

그런데 이 글을 모두 쓰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가볍고 꽃잎 같고 깃털 같고 먼지 같은 영화가 사실은 내 일생을 관통하는 엄청난 영화였다는 것을.

그 영화는 아무 때나 느껴질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고통 없이 들여다볼 수 없는 지점을 건드렸고, 그 고통을 견딜 힘이 없으면 아예 보이지 않는 영화였다.

나는 살아오면서 내가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의아해했고, 어떻게든 감동을 느끼려 애써 왔다.

그러나 그것은 감동의 결핍에 대한 이해였지, 감동을 감당할 힘의 부재에 대한 인식은 아니었다.

나는 감동이 없어서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어서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고통을 견딜 수 없으면 기쁨도 느낄 수 없고, 슬픔을 견딜 수 없으면 사랑도 느낄 수 없으며,

상실을 인정할 수 없으면 존재했음 또한 거기에 없다.

어느 것도 하나의 감정으로만 오지 않는다.

내가 기뻐하기 위해서는 슬픔을 느껴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나는 이제 기쁨을 느낄 준비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말은 곧, 슬픔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는 말과 같은 뜻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 감상이 흐려지기 전에 바로 적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나는 것도 없고 감동도 사라지고 입장권 한 장만 남는다.

마치 그 시간이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그런데 오늘 〈굿 포춘〉을 다시 떠올리며 생각이 달라졌다.

그렇게 서둘러 느끼고 서둘러 처리할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언제 다가와 언제 노크할지 모르지만 다시 떠오르는 그 순간에 써도 괜찮겠구나.

아니, 오히려 그게 더 괜찮은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모든 일을 즉시 처리하는 것이 삶에 능숙한 태도라고 믿었다.

미룬다고 사라지지 않으니 빨리 해치워야 한다고. 그 일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서서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으니 서둘러야 한다고.


삶은 농사 같다고 배웠다.

모내기는 봄에, 추수는 가을에 해야 하고 때를 놓치면 거둘 결실은 없다고.

그래서 나는 시간에 쫓기며 살았다. 뛰어가며 사랑했고 달리면서 아이를 낳았고

자전거를 타며 젖을 먹였고 오토바이를 타고 삯바느질을 하며 삶을 질주했다.

전 인생이 곡예사의 삶이었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옛사람들의 경험을 나는 진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배운 것들에 밀려서 사는 삶이 아니라 그 존재와 내가 만나는 날,

그때 그 일을 하는 나만의 속도로 살아도 된다는 것을.

방구석에 놓아두었던 달력을 한 달이 다 되어서야 벽에 걸었다.

못을 박으려다 포기하고 작은 고리에 걸어 문 틈에 끼워 두었다.

꼭 못을 박지 않아도 된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게 내가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다.

고리에 걸린 달력은 언젠가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다시 걸면 된다.

완벽할 필요도 단단할 필요도 온전할 필요도 보기 좋을 필요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일을 하면 된다.

미루던 달력을 걸다가 미루던 영화를 떠올렸고 뒤늦은 후기를 쓰며 삶의 전환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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