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의 햇빛

글뚜기가 개명합니다.

by 정오의 햇빛

글뚜기는

이글 저글 남의 글을 구경만 하고 다니는 메뚜기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게다가 글도 제대로 못쓰니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는 생각에 지었습니다.

어찌나 딱 맞는 느낌인지 옷을 입은 듯 편안했어요.

아무도 묻지 않는 나의 이름.


묻는 사람 없지만 적어봅니다.


왜 정오의 햇빛일까.

정오의 햇빛은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그림자를 최소화한다. 내가 어디에 서 있든, 그림자는 길게 뻗어나가지 않고 발밑에만 잠깐 존재한다. 가장 짧은 그림자를 남기는 빛. 하이 눈이다.

사람은 자기 그림자를 보며 자신을 느낀다. 하지만 그림자는 내가 아니다.

아침 햇살은 빛이 낮다. 빛은 강하지만 내 발등부터 차오른다. 그래서 그림자가 어마어마하게 길어진다. 그 긴 그림자를 나라고 착각하면 큰 오해가 생긴다. 그것은 트라우마의 그림자일 수도 있고, 과거의 영광이 늘어진 그림자일 수도 있다. 그 그림자를 자신의 전부로 믿는 순간, 사람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거나 왜곡한다. 영광의 그림자를 자기 실체로 착각하면, 역사는 언제든 비극으로 치닫는다.

석양의 빛은 또 다르다. 분명 빛은 있는데, 그림자는 형체를 이루지 못하고 흐려진다. 노을이 되어 이미지로만 남는다. 아련하고 아름답지만, 그 속에서는 나를 정확히 볼 수 없다. 감정은 남지만 실체는 사라진다.

모든 걸 서사로 만들고 판단도 책임도 사라지고 감정만 남는다.


그래서 정오의 햇빛이다.

정오의 햇빛은 그림자로 나를 해석하게 두지 않는다. 그 빛에 서면 나는 그림자가 아니라 몸 자체로 드러난다. 반사되는 환함 속에서, 실체로서의 나를 마주해야 한다. 상대를 알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능하다면 실체 쪽으로 빛을 비추고 싶다. 정오의 햇빛은 위로도 위협도 평가도 아니다. 왜곡을 거부하는 빛이다.

정오의 햇빛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는다.

정오의 햇빛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다.


우리는 사람을 자주 그림자로 인식한다. 외모, 직위, 차, 목소리, 능력.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그림자다. 그런데 그 그림자를 그 사람이라고 믿는다. 실체는 보려 하지 않는다.


돈도 그렇다.

돈을 돈으로 인식하면 그저 종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돈을 자기 크기로 환산한다. 돈이 많으면 큰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건 돈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돈이 만들어내는 힘의 그림자에 대한 인식이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같다.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신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기혼인지 미혼인지, 돈이 많은지, 날씬한지, 노래를 잘하는지 같은 외적인 결과물로 판단한다. 존재가 아니라 부착물로 사람을 안다.

정작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관심도 없고, 접근하지도 않는다.

존중 없는 시선이다.


철학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철학을 철학 언어로 말하면 대학생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더 문제는, 철학을 가르친다는 사람들조차 경험이 아니라 학습된 지식을 말한다. 철학을 지식과 이론으로 재현한다. 쌓아온 데이터는 합리적이지만, 거기에는 삶이 빠져 있을 수 있다.


정치나 의료도 다르지 않다.

젊은 사람이 ‘저속 노화’를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말은 늙어본 경험이 아니라 데이터의 결과다. 문제는, 그 데이터가 인기를 얻는 순간이다. 그림자가 길어진다. 그리고 사람은 그 그림자를 자신으로 착각한다. 그때부터 균형은 무너진다. 데이터의 함정에 걸려 잘못된 길로 빠져버린다. 경험 없는 철학 데이터만으로 만든 철학은 설득력은 있어도 삶을 변화시키거나 체험적으로 공감시키지 못한다.


철학 없는 정치인은 초고속 승진만큼 초고속 추락을 한다. 자기 삶이 아니라 인기, 지식, 데이터로 쌓은 명성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림자는 길었지만, 정오의 햇빛을 견딜 실체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 삶과 경험이 철학과 판단의 근거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한 명성과 권력을 쌓아도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우리는 사람을 어떤 빛으로 보고 있는가.

아침의 빛으로, 저녁의 빛으로, 아니면 정오의 햇빛으로?

정오의 햇빛은 잔인하다.

그 어떤 미화도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빛 아래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실체에 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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